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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r 01. 2020

<1917> 리뷰

영겁의 찰나


<1917>

(1917)

★★★★


 <007 스카이폴>과 <007 스펙터>를 연달아 찍은 샘 멘데스 감독이 5년만에 돌아왔습니다. 2019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을 위협했던 <1917>이죠. 결국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 생애 두 번째 촬영상을 포함, 음향믹싱상과 시각효과상까지 세 개 부문 수상에 성공했습니다. 조지 맥케이, 딘 찰스 채프먼,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베네딕트 컴버배치, 앤드류 스콧 등이 출연했구요.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독일군이 모든 통신망을 파괴한 상황에 영국군 병사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에게 하나의 막중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바로 함정에 빠진 영국군 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에게 에린무어 장군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는 것이죠. 1600명에 달하는 아군은 물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친형의 목숨까지 달린 블레이크는 지체할 겨를도 없이 사지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는 '영웅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며 희생되어야만 했던 참상을 재현하려면 응당 그 광경 이상의 정당성을 보여주어야 할 테니까요. 한 사람, 혹은 부대나 단체의 영웅담은 극한의 상황과 맞물려 최대한의 숭고함을 가져갑니다. 전쟁의 종류와 시기는 달라도, 심지어는 지어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두 비슷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런 식의 영웅담은 아주 유사하게 다시 만들어도 여전한 흥미와 작품성을 보장한다는 큰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액션과 드라마 중 감독과 각본가마다 지향점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양쪽 모두의 강점을 취하며 시너지를 내죠. 어떻게든 명장면 하나쯤은 만들어낼 여지는 충분하고, 그 명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이상의 양념은 아낄 수 있습니다.


 <1917>의 시작점엔 두 명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죠. 블레이크는 기존의 전쟁 영화들이 아주 사랑할 법한 인물입니다. 군인답게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고, 훈장을 아주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젊은 혈기로 가득해 전장에 뛰어드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으며, 적진을 뚫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에도 친형이라는 커다란 동기가 있죠. 가족을 사랑하고 동료를 아끼며 앞으로 나아갈 이유까지 분명합니다.



 반면 스코필드는 아주 의도적으로 블레이크와 많은 부분에서 정면 충돌하는 인물입니다. 가족들을 보러 돌아가는 것도 탐탁지 않아하고, 훈장 따위는 고철 덩어리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뒷구멍으로 사식(?) 받아내기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심지어 수천의 목숨이 달린 이 막중한 임무마저 누워 자다가 얼떨결에 맡게 되었죠. 그런데 영화는 블레이크가 아닌 스코필드를 주인공으로 택합니다.


 여기에 <1917>은 영화의 모든 진행 상황을 하나의 연속된 테이크로 보여주는 기술적 접근을 더합니다. 영상 연출에 있어 축약과 강조를 해내기에 가장 쉽고 근본적인 방법을 포기하죠. 이를 통해 영화는 관객들을 주인공들의 바로 옆에서 모든 상황과 감정을 아주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리에 놓습니다. 동시에 기존의 전쟁 영화들이 택했던 연출 방식을 자연스레 떠올리며 <1917>만의 강점이자 개성을 능동적으로 느끼도록 하죠.



 그렇게 <1917>은 얼핏 전쟁 영화의 주인공일 수 없을 것만 같은 인물의 전쟁 중 행적을 실시간으로 따라갑니다. 바로 전쟁의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속성인 '시간과의 싸움'을 강조하기 위함이죠. 관객들은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2시간 안에는 어떻게든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있는 이상 승자와 패자도 예측이 가능하고, 누가 어떻게 되리라는 사실 또한 충분히 내다볼 수 있죠.


 하지만 전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의 전투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죽을 수도 있지만, 옆을 지나가던 쥐가 밟은 부비트랩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라면 응당 가장 두려워할 죽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랑이며 정의도 다 좋지만, 일단 누구라도 살아 있고 더 이상 두려워할 죽음이 없어야 가능한 사치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땅 한 뼘 더 먹겠다고 3년을 싸워도 이상하지 않은, 끝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자 공간입니다. 



 영화는 이처럼 끝이 없는 시간 속 주인공들에게 시간에 쫓기는 임무를 부여합니다. 끝없이 움직이는 주인공들의 눈은 관객들의 시선과 이어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합니다. 즐비한 부상과 시체 가운데 생명의 도리와 가치는 너무나 쉽게 빛을 잃습니다. 영화는 관객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이를 되새기고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등을 떠미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시간 그 자체입니다. 이 임무가 끝을 맞이하더라도 여전한 전쟁은 무심하게도 진행 중일 뿐이죠.


 각본과 기술 모두 기존의 영화들과는 긍정적으로 다른 영화입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나무, 주인공이 우연히 손에 넣은 우유를 이후 다시 꺼내는 과정 등 퍼즐과도 같은 상징적이고 문학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았구요. 장면의 속도 조절부터 이름난 배우들을 활용하는 방식까지, 탁월한 완급 조절로 똑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분명한 강약을 확보합니다.



 극한의 체험을 추구하는 영화가 그를 너무나 완벽하게 해냈다는 이유로 몰입을 깨뜨리고, 그것은 또 다른 감탄으로 이어져 영화의 강점을 강화합니다. 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렇게 찍었나 하는 경외감까지 유발하는 장면들 덕분이죠.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이 그렇지만, <1917>은 서술한 모든 이유 하나하나가 바로 극장 환경에서 관람해야 하는 근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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