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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엉 Nov 30. 2021

회사는 빅플레이어가 되고 싶어하지만

얼레벌레 스타트업 마케터의 일기 #7. 현실은

아침부터 회의에 다녀왔다. 외적으로만 심란하면 모르겠는데 복잡해진 마음이 마구 요동치며 나와의 채팅창이 지저분해졌다.


회사는 투자 유치에 성공한건지, 갑자기 많은 일들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정신 없어지기 시작했으나, 나는 이제 곧 나의 지붕을 잃는다. 팀장님이 퇴사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아직 새로운 팀장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기도 하다. 


'회사의 목표가 나의 목표인가?'하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답해왔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나는 회사가 크는 만큼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고, 보상이 매우 확실한 곳에서 일해왔다. 나는 마더 테레사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들을 했고, 그렇게 증명해온 것들이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여기에서 해 온 일들을 바탕으로 나에게 이런 일들까지 시키는 것인가?'하고 보면 영 아닌 것 같다. 목표와 업무량은 늘었는데, 정작 나를 보면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인력이 나뿐이니까 내가 해야되는 거다.


친구랑 했던 말이 있다. '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 시대.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시절도 아니고 내가 먹여살려야 하는 식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 약간의 긴장감,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월급. 그리고 '일하고 있는 나'에 대한 만족감. 이 회사에 와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건 나와 잘 맞는 팀장님과, 할 수 있는 일들, 하는 만큼 눈에 보여지는 성과들 때문이었다. 근데 이제 나 진짜 혼자인데, '나에게 이런 일까지?' 싶은 일들을 맡기려고 하는 회사를 보니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현실은 작다. 회사는 시장을 선두하는 빅 플레이어가 되고 싶어하지만 사무실에 앉아있는 건 인턴들과 파트장(=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들이다. 투자 유치에는 성공했으나 나의 지붕이 마음을 고쳐먹을 만한, 설득할 만한 기둥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는 오전 내내 한숨을 쉬었다.


시키면 하겠지. 나는 책임감 있는 엔프피니까. 그리고 잘하고 싶으니까. 그렇지만 나를 이렇게나 대책없이 광야로 내모는 건 영 아니지 않나. 정말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거라고 믿는 걸까?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믿을 만한 직원이라는 뜻인가? 그와 관련하여 나에게 월급 인상이나 승진 발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나? 장급 회의에 내가 들어가면서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저 질문들 중에 하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앞에 닥친 일을 해(내)야만 한다. 어제 새로 산 체크무늬 컵 코스터 포장을 뜯어 일력 옆에 두고 퇴근하면서 모니터 앞을 꾸미며 살아가는 직장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글을 쓰려고 했는데, 갑갑한 현실에 한숨 뿐인 글을 쓰고 있다.


퇴근하고 이력서를 새로 고치는 삶을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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