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짧을수록 좋고 만남은 질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이별 없는 만남은 없다.
슬프지 않은 이별도 없다.
슬픔 자체가 아름다움과 통하기에 아름다움은 슬픔의 완성이다.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도 모태와의 이별 형식이다.
태아의 ‘앙’하고 우는 것은 자궁속의 세계와의 이별을 알리는 것이다.
태초에 제한된 시간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는 창조주가 인간을 만든 것도 낙원과의 이별이다.
가까운 가족과의 영원한 헤어짐은 가슴 치는 고통과 사금파리의 아픔이다
첫 사랑과의 이별 역시 신선한 사랑의 연장선이자 새로움이다.
예술가의 작품 속에도 완성과의 이별인 미완성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슈베르트가 25세 때인 작곡했지만 4학장이 아닌 2악장까지만 작곡된 <미완성 교향곡 8번>이 완성된 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다.
브람스가 말한 대로 31세로 요절한 "슈베르트의 삶 자체가 미완성이었지만 그의 음악적 영향은 미완성을 넘어선다. 양식적으로 미완성이지만 내용은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열려 있는 작품이요, '완성되지 않은 완성품'이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영혼을 끝없는 사랑으로써 휘어잡고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노예상'은 돌덩어리에서 꿈틀대는 완성품을 캐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직 조각되지 않은 대리석 덩어리가 남아 있어 형식상으로 미완성이다. 하지만 대리석 속에 갇힌 노예를 해방시키려는 완벽하고 치밀한 모습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명화(名畵)들도 대부분 이별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래야 관객들이 그 아쉬움에 공감하고 기억 속에 젖어드는 것이 아닐까?
이별도 만남과 같이 중요하다.
인간은 이별로 시작해서 미완성으로 남는 존재이다.
이별은 짧게 만남은 길게 하는 것이 지혜인지 모르겠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는 감미로운 변명 대신에 언젠가 있을 이별에 지금 사랑으로 보내주는 것이 현명하다.
"
이별의 시간이 될 때까지는 사랑은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는
" 칼릴 지브란의 말이 있다.
어느 한 사람의 사랑과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이별이 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만남이든 언젠가는 헤어지기에 지나간 사람 또는 나를 평가하는 시간이 온다.
유종의 미를 생각하라.
헤어졌어도 상대방을 그립고 고마운 마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짧은 헤어짐 오랜 만남이 아닐까?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 나는 죽기 위해서, 당신들은 살기 위해. 어느 편이 더 좋은 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소크라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