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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혁 Aug 23. 2017

흉노제국 몽골고원에 첫발을 딛고,  테를지 승마

3일차: 몽골의 역사공부와 말 타기  

     

말발굽으로 대륙을 깨우다.

초원보다 깊고 포근한 몽골의 마음.

신년 신찔(12월31일) 온 가족이 모여 덕담.

민주화운동 이후 공산정권에 의해 제국주의자·전쟁광으로 낙인찍혔던 칭기즈칸의 복권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궁갈로트를 출발하여 1시간 30분 걸려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태를지 국립공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 문화유산이다.

2000년 전 바다에서 솟아오른 지역으로 희한한 형상의 괴석(거북바위, 책읽는 바위, 할아버지 바위 등 ) 이 많다.

또한 자작나무 숲이 둘러싸여 트레킹 삼림욕을 하기에 좋았고

주변에 나지막한 야생화의 향취가 아직도 눈에 가물거린다.

     

몽골의 새로운 동네에 갈 때에는 '어워'를 만난다.

여행하는 길에 안전을 기원하면서 돌을 올려놓는다.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아랫돌을 돌을 얹어 넣는 것으로 우리나라 샤머니즘 성황당과 비슷하다. 나도 여행의 안전과 가족의 행복을 기리는 마음으로 한 번 돌았다.

     

사진: 승마체험장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승마체험이다.

서울에서 몇 번 트랙을 도는 체험은 했지만 초원을 달리는 경험(사실 걸었다는 것이 올 바른 표현)은 처음이라 가슴이 뛰었다.

     

조련사가 말에 오르고 채찍 잡는 법 등 약 30분 정도 말을 잡아주다가 말고삐를 놓고 혼자 타보라고 했다. 몽골에서는 “세 걸음 이상의 거리는 말을 타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과 친하다. 한 살만 되어도 어른이 말을 태워 다니면서 말과 친해지게 한다. 걸음마보다 말 타는 것을 먼저 배운다고 한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기에 허리를 고추 세우고 말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이 때 절로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말을 잘 타서가 아니라 승마 체험용 말은 길들인 말로 ‘초우’ 라는 호령과 채찍을 때리지 않는 한 천천히 걷는데 익숙하다.

 


여하튼 강을 건너서 초원을 가로지르는 8킬로 약 2시간 걸친 승마는 멋진 경험이었다.

이 넓은 땅의 주인공인 칭기즈칸의 기상과 말(속도)로 세계를 정복한

리더십이 생각이 든다.

     


칭기즈칸 노마드

     

                             

역사를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며

사랑하는 만큼 행복해 지는 원리를 아는가?

     

세상을 한 몸에 들쳐 업고 세차게 달렸던

천하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기상을 느낀다.

     

땅에서는 말 등에서 대지를 진동시켰고

하늘은 뭉게구름삼아 바람을 재촉했다.

     

세계인의 자존심을 하나로 묶어

같은 형제자매 되기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800년 썩혀왔던 깊고 넓은 안목을 깨우고

이제야 전 세계를 향한 평화를 외치리라.  

 

칭기즈칸은 없는 것을 만들었고

있는 것을 계승하는 생동감의 향취가 그립다.

     

칭기즈칸의 빠른 죽음이 안타깝고

자존심을 위해 인생을 바친 그 정성이 가득하다.

     

칭기즈칸의 단 한 가지 유언을 지켜라

머무는 자 반드시 망할 것이고

이동하는 자만이 번성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몽골 인이여 일어서라

오랜 침묵을 깨고 질시와 반목을 떨쳐버리고

부강한 나라가 아닌 아름다운 나라로 부상하라

 

 

유용한 몽골어 표현, 제주도 사투리와 비슷하다.

     

몽고는 蒙古. 우매하고 답답하다는 뜻의 중국인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부른 이름이다. 따라서 몽골 사람들은 몽고라 부르면 정말 싫어한다.

새해에는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선보이고 아이락을 마시며 덕담을 늘어놓는다. 우리의 가족 문화와 유사하다.

 

사인바이오?(안녕하세요),

바이롤라(고맙습니다)

건강하시지요?(타니 비 사인오)

오름( 오~르 사투리 )

비비리히(비발희, 아가씨)

달(타라, 달)

     

사진: 야생화 


몽골 역사의 원류를 찾아서

     

몽골이라는 대제국이 어떻게 역사에서 작은 나라로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칭기즈칸 이후 몽골을 약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 중 하나가 라마교를 전폭 지원하는 것이다. 몽골의 모든 장남은 라마교의 승려가 되어 결혼을 못하게 했다.

보통 절에 300명~3000명의 승려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간교한 간섭이 효과를 보았다.

20세기 초 외몽골의 인구는 120만 명, 중국이 차지한 내몽골은 2,000만 명이 달했다.

칭기즈칸의 후예를 없애기 위해 칭기즈칸이란 성 조차도 말소시켰고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교육에서 찬란한 역사를 뺐다.

심지어는 칭기즈칸을 중국 역사의 부족 왕으로 여긴 것이다.

1921년 구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110,000명의 라마승려가 700여 곳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수많은 승려들이 체포되고 시베리아의 강제노동현장으로 보내졌으며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약탈당했으며 모든 종교적인 제례와 축제는 금지되었다.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종교의 자유가 생겼다. 몽골은 대부분이 라마교를 믿고 일신교이므로 타종교에 배타적인 편이다.

몽골은 오늘날 인구 증산 책으로 300만 명으로 늘렸고 남북 몽골의 통합을 염원하고 있다.

     

몽골의 탄생설화는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비슷하다. 호리 투메르는 바이칼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고니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웃을 숨긴다. 아내로 만들어 11명의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아니가 고니 옷을 입고 싶다고 하자 망설임없이 옷을 꺼내자 날아가 버렸다. 고니의 다리를 붙잡고  자식들의 이름이라도 지어주고 가라고 부탁한다. 11며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축언한 후 날아갔다. 11명은 11부족의 시조가 되었다.

 

사진: 몽골 화폐


몽골에는 70만 년 전 살기 시작했고 흉노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다

북방민이 번갈아 지배자로 군림(선비 기원 2~4세기, 유연 4~6세기, 돌궐 6~8세기, 회골 위그르 8~9세기, 거란 10~12세기)했다.

     

몽골의 주요 민족인 할하족(族)은 몽골 제국기에 형성된 몽골족 중 동몽골에 속하며, 원의 멸망(1310년) 이후 몽골제국이 소멸되고 15세기 무렵에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할하강(江) 유역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러나 1688년 청(淸)에 복속되자 그 거주지는 4부(部) 86기(旗)로 세분되어 ‘외몽골’로 불리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의 지도자들은 이를 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잡고 러시아의 지원 아래 그해 12월 우르가(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혁명을 일으켜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몽골 제1차 혁명).

     

그러나 중국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쳐 러시아·중국의 각서교환에 따라 자치만 인정받았고, 러시아에 11월 혁명(구력 10월)이 일어나자 그 자치도 중국에 의해서 1920년 철폐되었다.

     

그러나 11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하급관료·지식인 등은 반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1920년 몽골 인민혁명당을 결성했다. 1921년 혁명군을 조직하고, 소비에트 적군(赤軍)의 원조를 얻어 중국군과 러시아 백위군(白衛軍)을 축출하고 신정부를 수립, 독립을 쟁취하였다(제2차 혁명).

     

1924년에는 군주제를 공화제로 고쳐 국명을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봉건·신권제(神權制) 잔재의 일소, 재산 사유권 금지 등을 규정한 최초의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에 따라 몽골은 구소련의 절대적 영향 하에 들어갔다.

     

그 후 몽골 정부는 사회주의 정책수행을 지향하여 극좌적 정책을 수행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1946년 국민투표 결과 몽골국민의 독립의지가 확인됨에 따라 중국(국민당정부)으로부터 정식으로 분리·독립을 인정받아  국제적 지위가 확립되었다. 중국과는 1986년에야 영사조약을 체결, 1987년에는 미국과도 국교를 수립하여 자유세계에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사진: 테를지 거북 바위 


교육은 8년 의무교육에 초등학교 683개교, 고등교육기관 63개교가 있다.

교육여건과 시설의 낙후에도 불구하고 2.2%의 낮은 문맹률을 보이고 있다.

     

물가에 비해 급여수준이 너무 낮아 대다수의 몽골인들은 문화, 여가활동을 즐길 수 없는 형편이지만 발레나 연극, 극장 등은 보편화되어 있어 가족 단위로 즐기는 편이다.

     

몽골인은 차를 매우 즐겨 마시며 일반적으로 수테차이(suutei tsai (소금차))가 있다. 아르히(arkhi, 보드카)를 마시고 발효시킨 말 우유에 3%의 알콜을 넣어 만드는 아이락(aikag)을 양조한다.

     

많은 몽골인은 이것을 증류하여 알콜 함량이 12%로 증가한 쉬밍아르히(Shimiin Arkhi)를 만든다.

     

또한 몽골인에게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다. 이들이 물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라마교에서 물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몽골에는 바다가 없어 물고기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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