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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혁 May 28. 2018

5월 29일 바로 옆에 스승이 있다는 데

음식이 병을 주기도 하지만 음식이 병을 낳게도 한다.

5월 29일 바로 옆에 모신 스승 

음식이 병을 주기도 하고 음식이 병을 낳게도 한다.     


아침 일찍이 피부병원을 다녀왔다. 

알레르기 증세와 면역력이 떨어져 밤새 가려워서 긁었다. 최근 1년 사이에 병원 다닌 횟수를 세어보니 

그동안  병원에 다닌 횟수의 몇 배가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 병과 친구가 되는 나이에 된 것인가? 

하기야 친구들 모임에서도 건강 이외의 주제에는 관심도 흥미가 떨어진지 꽤 오래 된 듯하다.    


힐리언스 선마을 야경


 

몇 년 전에는 허리가 아파서 꼼짝 못할 때가 있었다. 

그 후 견딜만하니까 이번에는 입 몸에서 피가 나고 시궁창 냄새도 낫다. 

치료가 끝날 무렵에 눈을 혹사한 지라 눈에 핏발이서 섯고 이물질이 들어간 처럼 거북했다. 

그 다음이 온 것이 피부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병원신세를 져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평소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들은 머리는 좋지 않게 태어났지만  조상들이 씨앗만큼은 좋다. 

당뇨나 혈압, 암 등 소위 성인병에 걸리지 않을터이니.”

그말이 적중한지 아직까지 형제들 간에 성인병으로 고생한 사람도 없었다. 

나도  감기 걸려도 병원에 가보지 않은 건강 체질이라고 자부했다.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병원 문닫겠다는 농담도 했지만....



힐리언스 단풍들 때 모습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목숨이란 게 참 질겨 "골골 팔십 세"라는 말이 지금에야  실감난다. 

병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잔병으로 고통 받고보니 이제야  건강했던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된다.

피상적이나마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어머니를 20년간 장남으로서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딸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몸조리 하러 집에와야 했다. 

더 이상 어머니를 모실 수 없게 되어 양로원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연신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잠을 못 잤다고 토로한다.

다른 동생들은 그동안 충분히 부모에게 효도했다고 하지만 부모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은 여전하다고 한다.     



                 명상 실습


부부 중 누가 먼저 죽게 된다면 새로 결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옷 입고 목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혼자되어 자녀들과 함께 산다는 것 역시  어렵다. 남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 

당연히 혼자 살 준비를 해야 한다.    


동창 친구가 시무룩하게 말한다. 

자기 부인이 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라고 한다. 평소 죽는 준비가 안 되어선지 아니면 

의료수준이 높아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생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민간요법을 포함한 모든 치료 방법을 쇼핑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치료비용이 늘어나고 남은 가족과의 재산문제로 머리를 끓게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교회 선배의 경우 항암치료도 거부한 채 가족과 여행 다니다가 

인생을 마감했다. 이전과는 상반된 경우도 봤다.

    



나는 과연 죽음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인생에 정답은 없다. 

명답을 찾아 스스로 공부하고 실천에 옮기는 수밖에 없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천국이나 극락에 갈 텐데 오히려 팡파르를 울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살아온 인생을 마감할 때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 

우리나라도 나 홀로족이 2015년 기준으로 5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이러한 변화가 고독사를 유발하겠지만 어차피 죽음은 가족이 있어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다. 


노년기 삶의 질을 높이고 ‘품위 있는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모호하다. 

개인적 격차가 워낙 심하고 솔직히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겨울 걷기 명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죽음의 방식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존엄사라고 본다. 

불필요한 여명치료를 거부한 채 남은 가족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삶이다.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최근 고 구본무 회장님의 아름다운 퇴장이야말로 나에게 모델이다. 

얼마든지 수명을 연장 할 수 있었겠지만 과감히 거부한 채 삶을 순응하고 소탈하게 죽음을 받아들엿다.

    

평소 건강할 때에는 죽음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았다.

이제서야 잔병을 치르고 주위의 분들의 하나씩 죽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과학에만 물리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관계의 물리학 법칙이 숨어있다. 


사람 사는 데 그냥 편해지고 좋아지는 법은 없다. 누군가의 희생과 어려움을 감수한 결과다. 

부모와 주위 친구들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농사짓고 혹은 기업을 통해 부를 제공한 분들 덕분이 아닌가?


죽음도 자연과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당당히 맞이해야 한다.  

물론 죽음에 대한 준비는 절실하다.



작은 병조차 나의 스승이다.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을 담대하고 자연스럽게 맞이하고 싶다.    




앞으로 여생을 

천상병시인의 시 ‘귀천’시의 마음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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