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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혁 Jul 13. 2018

자식은 나이들어도 어린아이일뿐

자식은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일 뿐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 _새 번역 성경 <고전 13:4~7>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이다.

손자들 장래를 생각하면 더 애틋해 지는 것이 나이 탓인가?

자식 결혼시키면서 모든 걱정 다 떨쳐버렸다는 상상의 순간도 잠시뿐.

      

자식에게서 한동안 전화가 없으면 걱정, 연락이라도 오면“무슨 일 없지”라고 

안부 먼저 묻는 조급증 러시가 현실이다.


“자식들이 집에 오면 반갑고 가면 더 좋다”라는 생전에 아버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하지만 자식들이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주 딸이 아프다는 소식으로 인해 우울했었다.

딸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처음에는 두 아이를 키우는 스트레스라고 가볍게 받아들였다.

계속 어지럽고 시야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걱정은 동네 병원을 수시로 다녀야했다. 

갈 때마다 새로운 병명이 나올 뿐 차도가 없었다.

  

이제는 대학병원에서 MRI를 찍어 뇌 검사해야하는 결단의 시간이다.

     

딸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한다.

자자기 증세와 비슷한 병을 추측하여 걱정 탓인지   5킬로의 체중이 빠졌다고 한다.

아내는 혹시라도 딸에게 나쁜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계속 추궁한다.

나 역시 무슨말로 위로하고 뽀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검사 전날 잠이 오지 않는다.

이어령 박사가 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의 메시지가 불쑥 생각나는 게 아닌가? 

“아이가 큰 다는 것은 부모 곁을 떠나 앞으로 나아가는 헤어짐의 긴 과정이기도 하다. 누구나 에게도 간섭할 수 없는 게 생이다. 아무리 아파도 딸의 고통을 대신 할 수 없는 외로움..”

     

나 역시 딸의 아픔 앞에서는 도움을 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기도하고 후회와 반성,  자신의 신앙을 뒤돌아보게 된다.

이제까지 건강한 것에 대한 감사는 사라졌다. 

그 대신

" 왜 딸에게 어려운 시련을 주십니까?" 라는 투정이 나오는 게 아닌가. 

스스로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이런 추악한 자신의 모습이 서럽다. 





딸의 아픔과 슬픔 앞에서 오래도록 고뇌한 탓인가? 아니면 썩지 않는 방부제같은 영혼의 갈급함인가? 

소금에 절여진 보잘 것 없는 생기없는  영혼의 몸부림인가?

나는 고독의 나락에 떨어진 시지프 신화의 형벌이라 몸소리 쳤다.

 

 믿음을 가장한 성공, 진리를 왜곡한 세속화, 위로를 핑계한 위선, 비판을 앞세운 사이비, 등 등.  


온갖 아픔을 맞닥뜨릴 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다시 무릎을 꿇게 되는 교만함이지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익한 종을 용서하옵소서.”

  

   


얼마 전 인터넷에 실린 이야기도 문뜩 생각났다.

어린 아이에게 탈모증이 생기자 아이는 우울해졌다.

그러자 애기 아빠는 아이의 슬픔을 나누고 싶어 자신도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의 손에 전기이발기를 쥐여 주고 자신의 풍성한 머리를 박박 밀게 하였다. 

딸은 자신의 모습과 같아진 아빠를 보고 몹시 행복을 느꼈다는 것이다.

딸의 아픔을 아비가 질 수 있다면 흔쾌히 질 수 있으련만.

     

부모란 자식을 위해 머리카락이 아니라 뭐든지 바칠 수 있는 존재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위해 젊음을 희생하고, 열정을 바친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에게 또 다른 기쁨이고 행복이다.  




희채오친(戱綵娛親)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70이 된 자식이 색동옷을 입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린다는 뜻이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자식일 뿐이다.

     

딸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몸도 마음도가벼워졌다. 

동시에 새로운 종교생활을 알리는 시작이 된 셈이다.

 마음의 아픔과 응어리진 분노를 사랑으로 해결할 때만이 진정한 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삶이란 예정된 소명이다.

경건하고 잘 살아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의 불행은 어제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

진정으로 나를 알고 주체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랑을 실천하자. 가까운 가정부터 이웃, 국가까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천사의 말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구절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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