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영혼을 이롭게 하는 가치추구하라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영혼을 이롭게 하는 가치를 추구하라
니체는 고통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하며 고통과 즐거움은 동시적 국면이라고 한다.
안락이라는 임시 거처에 만족하기보다는 더 커다란 고통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
한편 홀로 2000년 넘게 이어온 서양의 정신을 파괴하겠다고 나선
니체의 두려움 없는 용기가 대단하게 생각되지만,
그 결과는 치욕적이다.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간 퇴행과 광기 속에서 고통 받다 죽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본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진리의 접근 불가성으로 말이다.
당시 니체의 죽음 상황을 유추해본다.
1989년 1월 3일, 니체가 토리노 거리 6번가 광장에서 한 마부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는 광경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다.
니체는 고통받고 있던 말을 자신으로 착각한 것이다.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쓰러져 정신병원을 드나들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미다스 왕은 현자 살레노스에게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살레노스는 답한다.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미 태어났다면 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파멸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성경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 레 미제라블을 소개한다.
누이와 일곱명의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친 청년 장 발장은 4번의 탈옥 시도로 인해
19년간 감옥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밀리에르 신부의 관용에 감동받은 장은 새롭게 태어나고 자신도 사랑의 강력한 힘을 실천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동일하지는 않다.
나름대로의 오르막 내리막의 굴곡을 겪기 마련이다.
간혹 평탄한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목격되지만 그 또한 자신의 편견일 뿐 속사정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인생은 고해라지만 어떤 고통의 순간이 지나면
찾아오는 환희의 순간이 반드시 있다.
또 다시 다른 고통이 다가올 수 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다.
고통의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치 수용소에서 아내의 죽음과 모멸감의 비참한 생활에서도 살아남은 프랭클은 말한다.
독일 정치가 비스마르크도
행복학의 대가 조지 베일런트의 말에 수긍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