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유와 후회
인생의 여유와 후회
인간으로서 아름답게 늙어가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자연스럽게 잘 살아가는 학문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몽테뉴는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피력한다.
“우리는 영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영혼을 공격하는 능력도 스스로 자킬 수 있는 능력도, 받는 능력도 주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평온한 노후를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고 다양성과 변화에 적응하는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인생에 세 가지 여유로움(三餘)을 말한다.
첫째는 하루 중 저녁이 여유로워야 한다. 열심히 일하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다.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저녁 식구들과 도란도란 저녁상을 받는 넉넉함이다.
두 번째는 일 년을 마무리하는 겨울이 여유롭고 새해의 기대감이다.
봄부터 부지런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풍성한 가을걷이로 곳간을 채운 뒤
긴 겨울을 보내는 충만함이다.
셋째는 노년이 여유로워야 한다.
자식들 잘 키워 결혼을 시키고, 손자를 보고 경제적으로 넉넉함과 건강하게 지내는 여유로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지만 행복의 기준은 다르다.
그러나 비록 행복의 기준은 달라도 여유로운 마음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젊어서는 가난, 지혜, 못생김도 모두 용납된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주변사람에게 폐를 끼치거나 본이 되지 못하면 이 또한 불행이 아닌가?
종교와 죽음은 매우 밀접하다. 죽음 앞에서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며 사후에 영혼이 사는 세계로 이동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유교에서는 천지만물이 음양, 오행이라는 기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흩어진다.
흩어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며 죽음은 자연의 고향인 기(氣)로 돌아간다고 한다.
우주는 영원한 합으로 죽음 역시 인간의 변형된 영존의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적선을 할 때 자손이 복 받는다. 도교의 경우 도를 닦아야 신선이 되는 것과 유사하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죽음이란 사람이 계절에 따라 헌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처럼 낡은 몸통을 버리고 새 몸뚱이로 옮겨가는 것이다.
윤회의 바퀴, 일련의 개인적인 환생, 업보의 법칙을 포함하는
우주론적 개념의 틀 에서 영혼의 여행을 의미한다.
달라이 라마는 죽음의 지도(地圖)란 자비로운 삶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두려움 없이 죽음을 건너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 안에서 가장 존경하는 종교에 귀의하라. 영적인 수행의 필요성과 여유를 모두 준 현재 삶의 본질을 기억하라.
무상에 대해 성찰하고 또 성찰하라.”고 가르쳐준다.
기독교는 천국에 가는 조건을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마 7:21) 최근 <교회오빠>라는 다큐 형태의 영화를 보았다. 젊은 부부가 모두 암과 투병하고 부모가 죽는 악 조건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굳건한 믿음으로 아름답게 죽어가는 모습이 감동이다. 종교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후에는 젊을 때 누렸던 장점 등이 서서히 사라진다.
탄력 있는 피부, 든든한 두 다리, 식욕, 좋은 옷, 돈, 잠잘 곳, 친구 등이 당신을 배신한다.
인도인들은 아쉬라마(Ashrama)라는 힌두교 전통에서 말하는 인생의 4가지 단계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사람의 수명을 100년으로 보고 25년씩 4가지 단계로 나눈다.
마지막 76~100세 사냐사(Sannyasa)의 시기로 세속적 욕망을 차단코자 집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나아가 수행에 전념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탁발을 하며 목샤(해탈)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힌두교도들은 다음 생은 지금 생의 쌓인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