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요람

간도는 옛부터 한민족의 근거지이자 독립운동의 메카

by 김진혁

간도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조선조 말 경제적 이유로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간도,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의 이주지역과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역할을 했다.


1919년 경성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간도지역에서도 3월 13일 룽징(龍井)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에는 항일 무장투쟁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의 봉오동전투, 김좌진(金佐鎭)장군의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그리고 훈춘사건(琿春事件) 등이 모두 연변을 거점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각종 한인자치단체와 한인 민족학교 ․ 군사무관학교는 독립전쟁기지 건설의 기반이 되었고 지역 한인사회의 결속력을 지탱해주는 구심점의 역할을 다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바탕으로 ‘한인자치단체’와 ‘민족학교’

는 무장독립투쟁을 담당할 독립군을 양성, 배출할 수 있었다.


북간도의 용정촌과 명동촌에서 간민회, 중광단 등의 단체가 만들어져 독립운동의 싹을 틔웠다.

간민회는 교육 선전으로 인재를 양성하였고, 옛 의병들을 모아 조직한 중광단은 무장 활동을 하려고 하였다.

주변지역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또 대종교세력이 만든 학교와 포교당, 명동학교 등의 많은 교육기관에서는 민족의식을 높이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간도지역의 독립운동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시기: 1895년~1921년


만주에 망명촌을 건설하고 독립군기지 개척과 계몽운동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다.

1906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국제정치 문제로 제기한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은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만주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그 전통이 규암 김약연의 명동학교로 발전하는 등 이러한 근대식 민족학교는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교육과 함께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조직들이 형성되어 이상룡,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서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연합한 대한 독립군 등이 있었다.


제2시기:1921년~1933년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에서 3,500명 정도의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적군과 교전하여 수많은 독립군 사상자를 낸 사건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이 있었다. 이후 조선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은 40세에 자결하고 호랑이 잡던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소도시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일하다 죽었다.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한족총연합회와 국민부로 개편되어 활동했다. 만주국과의 전쟁은 민족진영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사회주의진영의 항일유격대와 하나가 되어 중국구국군대와 연합작전을 펼쳤다.



제3시기 1933년~


1932년부터 3년 4개월 지속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좌경적 오류인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북인민혁명군 내 조선인들이 큰 피해를 입어 독립운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 뒤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새롭게 항일독립운동에 매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간도에 조선인 중심으로 '간도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중국은 지배권을 놓고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간에 국ㆍ공내전(國共內戰)이 벌어졌다.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마감되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고 연변은 중국공산당 연변위원회(延辺委員會)가 간도임시정부를 접수했다. 이 위원회는 연길, 훈춘, 화룡, 왕청 그리고 안도 등 5개 현을 관할했고, 간도시를 옌지시로 개명하여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다.

200만에 이르던 조선인 수가 1945~46년 사이 100만 명 수준으로 감소되었는데, 이는 100만 명 정도가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1980년 2월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연변지역에 자치권과 소수언어를 공용어로 쓸 수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 허가됐다.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이 원활한 간도 지역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함께 독립운동의 현장인 것이다. 고구려 때부터 우리 영토였던 간도의 중요성에 두 가지 의문점을 제시한다.


첫째, 간도협약의 효력여부이다.


1905 년 한국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임의로중국과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를 중국에 귀속시켰다. 한중간의 중요한 영토문제를 제3국인 일본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것은 문제이다. 을사조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무효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간도의 미래가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전략적 요새로서 한중일 삼국의 세력이 접촉하는 완충지대이다.

이곳을 차지하는 것은 동아시아를 제압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간도에 실제로 조선인이 거주하며 호흡하고 있는 곳이다.

중국은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조선족을 통합하지만 한국 민족에게는 동포로 간주해야 하는 역학관계를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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