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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y 16. 2017

더 이상 재밌을 수 없다.

백당나무 꽃

씨앗이 싹을 틔우고 상추 이파리가 하루가 다르게 무성 해지며 꽃들이 다투어 피는 오월의 시골 살이는 일 년 중에 최고의 기분을 만끽하게 해준다.


비라도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저 꿀비를 맞고 초록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얼마나 자랄까 기대에 차서 흐뭇하다. 실제로 봄비 한번 오는 것이 부지런히 물 주는 것보다 작물들의 성장엔 훨씬 더 효과적이다.


한 달 전에 직파한 땅콩이 이제나 저제나 싹이 나올까 애타게 기다렸는데 비를 맞고 나더니 모조리 싹을 올렸다. 씨앗을 뿌린 상추는 여린 이파리를 쪼르륵 피운다. 모종으로 심은 상추는 고라니가 먼저 맛을 보았지만 우리도 뜯어서 쌈 싸 먹고 비빔국수에도 넣어서 먹을 만큼 무성해졌다.  


텃밭이 왕성한 움직임을 보이는가 하면 뒤뜰의 화단도 분주하다. 수선화는 벌써 지고 붓꽃과 아이리스가 꽃대에 보라와 노랑의 꽃을 매달았다. 하얀 마가레트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초봄에 꽃씨를 뿌리고는 여태껏 아무 기별이 없어 포기했던 팬지도 비가 오니 뿌린 흔적대로 싹이 나왔다! 쑥쑥 자라고 있는 화단의 꽃을 보면 작물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먹을 수는 없지만 예쁘니까 늦게 펴도 좋고 예민하게 굴어도 밉지 않다.


집만 짓는다고 끝이 아니라 나무도 심어야지, 꽃도 가꿔야지, 잔디도 손질해야지 집 주변을 돌아다보며 일이 끝이 없지만 그게 또 재미가 있다. 셋집에 살 때는 텃밭 농사 외에는 할 일이 없었는데 (마당도 심지어 다른 사람의 소유였으니) 내 집은 돌담까지도 물로 싹싹 씻으며 공을 들이는 남편이다.


다행히 좋은 이웃이 산 중턱에 사는 덕분에 라일락, 매자나무, 백당나무, 영산홍에 이어 제법 자란 감나무와 커다란 불두화까지 얻어오기로 했다. 정성껏 가꾼 여러 가지 야생화를 캐와서 우리 집 화단에 심고 나무까지 돈 주고 사 온 건 하나도 없이 모두 얻어왔으니 시골 생활은 이웃을 잘 만나면 우리처럼 횡재할 수 있다.


흙을 만지면서 캐고 심고 다독거리는 모든 과정이 얼마나 즐거운지 힘든 줄도 모르고 하게 되고 저녁엔 밥숟갈만 내려놓으면 쿨쿨 다.


새로 산 구두와 주말에 쇼핑한 옷을 차려입 출근하던 예전의 내 모습을 이제는 찾을 수 없다. 바지 위로 호스를 대어 흙을 물로 씻는 나를 보더니 남편은 기겁을 했다. 오줌을 받아 삭히면 좋은 질소 비료가 된다는 글 읽고 까나리 액젓 통을 화장실에 놓고 남편에게 소변을 보라고 했더니 남편이 깜빡하고 변기에 누어 버려 내가 그 어려운 일을 해냈지 말입니다.(남편은 이 얘긴 절대 남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물과 십 대 일로 희석해서 작물 옆의 땅에 뿌면 된다고 한다.


쌀뜨물에 흑설탕과 김칫국물을 넣어 발효한 액비를 딸기 모종에 몇 번 뿌렸더니 이파리가 금세 몇 배로 커지는 걸 내 눈으로 보고 나니 질소 비료도 이렇게 직접 생산하게 되고 달걀 껍데기를 식초에 담가 난각칼슘 비료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내가 진정 갖고 싶은 건 예쁜 옷도 비싼 백도 아니고 깻묵이나 한약재 찌꺼기를 발효해서  뜨끈뜨끈 김이 나는 퇴비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그게 있으면 화단의 꽃은 탐스럽고 커다란 꽃을 피울 것이고 밭의 작물들은 튼실하고 윤이 나게 자랄 것이기 때문에 공부를 더해서 좋은 거름을 만들어 보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브런치 작가 중 온수님은 여자 목수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는데 나는 온몸에서 퇴비 냄새를 풍기는 정원사 또는 농부가 되는 게 꿈이다.



선명한 고라니 발자국
그래서 망을 밭 둘레에 빙 돌아가며 둘렀다.





액비 덕분에 커진 딸기
한국의 허브인 방아잎
자갈 아래 부직포를 깔았으나 뚫고 잡초가 올라온다.
감나무를 침실 앞 가장 따뜻한 곳에 또 한 그루 더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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