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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Feb 26. 2018

시골 마을의 강원도 여행

고등학교 때 교실에서는 두 명의 주번이 일주일 동안 주번 활동을 했다. 쉬는 시간마다 칠판을 닦고 분필 지우개를 털고 마실 물을 떠다 놓는 등 학급의 자질구레한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는데도 칠판이 닦여져 있지 않으면 모두가 "주번 누구야? 주번 나와!"를 외치며 찾곤 했다. 그 주의 주번이 누구인가에 따라 교실 활의 쾌적함이 크게 좌우되었다. 내 짝꿍은 시골에서 온 순박한 아이였다. 출석 번호 순서에 따라 두 명씩 주번을 했기 때문에 내 짝과 주번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말수 적은 그 애가 주번이었을 때 활약상은 눈부셨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오면 목이 말라 물주전자를 찾는데 그때마다 주전자 가득 찰랑찰랑한 차가운 물이 물방울을 매단 채 교실에 놓여 있었고 그 아래 컵을 헹궈 버리는 양동이는 싹 비워져 있었다. 쓰레기통도 차기가 무섭게 깨끗하게 비워져서 내 짝이 주번을 맡고 있었을 때는 학급 생활이 조금의 불편함 없이 쾌적했다. 책임감이 부족한 주번이 맡을 땐 반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표현도 없고 말도 별로 없었던 과묵한 내 짝꿍은 주번일 때 그 존재감이 높이 빛났다.


시골 마을의 전원주택 일곱 가구의 모임에서 일박이일의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시작은 속초 중앙 시장의 꽈배기가 먹고 싶다는 어떤 이웃의 말 한마디가 커져서 회비를 걷어 다 같이 떠나보자로 발전했다. 전체 일정을 맡은 이웃은 강원도를 잘 아는 분이어서 적당한 동선으로 여행 일정을 짰고, 회계를 맡은 이웃은 꼼꼼하고 착실한 성격으로 빈틈없이 예산을 짜서 똑 떨어지게 결산을 했다.


금요일 오전 열 시에 열 세명의 인원이 차량 네 대로 나눠서 타고 마을을 출발해서 속초의 물회로 점심을 먹은 뒤 설악산 비선대를 두 시간 동안 걷기로 했다. 오후엔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설악 금호 리조트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황태정식을 먹는 것이 첫날 일정이었다. 숙소는 복층으로 방 세 개와 화장실 세 개를 얻어 다 같이 모여서 자는 걸로 했다는데 안방 침대와 복층 방에서 여자들이 자고 거실과 방 하나에서 남자들이 잤다.


토요일은 숙소에서 사우나를 하고 간단히 누룽지로 아침을 먹은 뒤 열 시에 출발해서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건어물 등을 산 뒤 매운탕과 전복죽, 멍게와 해삼 등으로 점심을 먹고 강릉 테라로사에서 커피와 빵을 먹었다. 새로 증축한 어마 무시한 규모의 테라로사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오후 들어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다음 일정인 정동진 부채길로 서둘러 이동했다. 역시 새로 만들었다는 부채길이 궁금했는데 파도치는 바닷가를 빙 둘러서 철제로 만든 둘레길이었다. 파도 구경을 하다가 물이 튀어서 바지를 적시기도 했다.


주말의 영동고속도로는 막히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해서 저녁을 여주 천서리 막국수로 하는 것으로 여행의 막을 내렸다. 이번 여행을 따라다니며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마치 고등학교 때 내 짝꿍처럼 묵묵하지만 세심하고 성실하게 일해 준 이웃을 다시 보게 된 점이었다. 성실 근면하고 반듯하기가 똑같이 닮은 부부는 숙소와 회계를 맡아 주었는데 어쩌면 그리도 세심하고 친절하고 자상한지 말없이 봉사하던 내 짝꿍이 절로 생각났다. 비선대 갈 때에는 물병에 담아 온 구절초 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해줘서 갈증을 덜었다. 또 주머니마다 귤을 넣어와서 하나씩 나눠줘 맛있게 먹었다. 다들 가볍게 걷고 싶어서 맨손으로 나선 길이었기에 귤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은 딱 그만큼만 필요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그 이웃이 집에서 직접 만든 색색깔의 강정을 내놓았다. 밥을 쪄서 말리고 그걸 다시 튀겨서 조청에 굳힌 강정은 석이버섯과 백년초를 넣어서 색도 아주 고왔다. 들깨 강정도 직접 만들어서 이웃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물만 부어서 먹을 수 있는 누룽지와 김치와 밑반찬, 과일, 주전부리 등을 골고루 장을 봐왔다.


준비에서부터 결산까지 소리 없이 봉사하는 그 부부는 사이까지 좋아서 '로열젤리'부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부인이 손가락 끝을 조금 다쳤다고 설거지를 한 달 가까이 남편이 했다는 말에 바로 최고봉의 부부 금슬로 등극했다. 최근의 사연에 따라 꿀물과 설탕물 그리고 맹물 부부까지 즉석에서 평가가 내려졌다. 늘 애교 있는 말투로 남편에게 다정하게 얘기하는 꿀물 부부도 있었고 늘 투닥거리다가 설탕물이라도 거머쥔 부부는 남편이 말끝마다 아내의 말에 반박하는 습관이 있어서 지적을 했더니 바로 "고쳐보리라."라고 대답해서 설탕물로 인정되었다. 덤덤하고 무미건조하게 지내는 이웃은 스스로 맹물 부부라고도 했다. 우리 남편은 출근하느라 여행에 끼지 못하고 나만 참석하게 되었는데 내 맘대로 우리 부부는 얼음물 부부라고 결론 내렸다. 명절마다 내 속을 상하게 하는 남편이 설을 보내면서 내 생일과 결혼기념일까지 있었지만 꽃 바구니 하나로 넘어가려 한 행태에 아직까지도 냉랭한 분위기로 지내고 있었기에 다음 모임에서 재평가를 받기 전까지 우리 집의 순위는 가장 낮을 수밖에 없다.


일박이일의 일정표


 


정동진 부채길의 파도
철제로 된 길이라 눈비에는 미끄러웠다.
오랜만에 가본 테라로사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언제부턴가 명절이 다가오면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남편은 명절을 맞아 자신의 형집으로 가고 싶은데 나이 많은 형수가 힘이 들어 안 오기를 바라는 것이 그 원인이다. 그리하여 남편은 명절에 자신의 형집으로 갈 수 없는 불만을 나에게 시비 거는 걸로 풀기 때문에 해마다 명절이면 이혼 얘기를 들먹거리게 한다.  예를 들자면 형수가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설에 바쁘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나는 우물쭈물 알았다고 대답하고 남편은 내게 친정에는 간다고 먼저 말했느냐고 묻고는 큰집과 친정이 같은 경남이라서 친정에도 간다고 내가 먼저 밝히면 차마 큰집으로 오지 말라고 형수가 말하지 못할 것 아니냐며 "당신이 무슨 핑계를 대도 결국 큰집에 가기 싫은 본심이 있는 거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대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큰집에서는 제사를 없애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걸 조카가 다시 간소하게 하는 걸로 의논이 되어 결국 남편은 명절에 큰집에는 아예 못 가는 걸로 결론이 났다. 일 년에 한 번 기제사만 참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고 그리하여 명절이 다가오면 남편의 기분은 끝없이 하향곡선을 그리며 가라앉는다. 친정부모님이 계시니 처갓집으로는 가야 하는데 그렇게 잔뜩 심술이 난 상태에서 가봐야 남편 눈치가 보여 명절이 즐겁지 않다. 남편은 가부장 문화에 젖어서 자란 사람이고 그런 집안 분위기가 당연한 것이기에 말싸움에 지친 나는 그냥 남편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설 즈음에 결혼기념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엔 그 이름도 거룩한 25주년 은혼식이다. 결혼기념일에 이혼을 들먹거리며 크게 싸운 적도 있었기에 이번에도 기념일은 안 챙겨도 되니까 설에 형집에 못 가는 화풀이나 내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정집에 있으려니 남편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 한참이나 있다가 들어왔다. 설 다음날이 결혼기념일이었는데 꽃집을 수소문해서 커다란 꽃바구니를 친정으로 배달시키려고 몰래 나가서 그 꿍꿍이를 꾸미느라 머리를 쥐어짰을 걸 생각하니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언젠가는 형수에게 따질 거라고 한다. 자신은 형집에 오고 싶은데 형수가 부담스러워하니 못 오는 거 아니냐고 정색을 하고 말할 거라고 하는데 그런 남편에게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 막내로서 명절이 되면 형집에 오고 싶고 오는 게 당연한데 형수가 가로막고 있는 게 무한 서운하고 이해가 안 되는 남편을 볼 때마다 내 속은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답답하고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나 또한 명절이 다가오면 다른 의미의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게 되었다. 먹지도 못 하고 쓰레기만 남는 꽃바구니 따윈 반갑지도 않고 거들떠보기도 싫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꽃바구니는 아무도 없는 양평집에서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일부러 서울 집으로 올 때 가져오지 않았다.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잘 챙겨보고 싶었는데 설 연휴에 끼여 있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언제까지 남편이 명절에 기분이 안 좋을 건지, 친정에 와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재미없는 얼굴로 앉아 있을 건지, 왜 명절이 되면 이혼율이 수직 상승하는지 깊이 공감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 나야말로 남편에게 따져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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