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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y 19. 2018

완치의 역습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는데 이젠 늘지 않는 글솜씨에 화가 난다. 암 카페에 나의 신변잡기를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도 감사했는데 이젠 암 완치 수기의 수상작에 뽑히지 않았다고 실망을 한다. 이유 없이 초조하고 불안하던 기분은 나에게 익숙했는데 암에 걸린 몇 년간 일상이 주는 감사에 빠져 지내느라 한동안 잊고 있었다.


마지막 검진에서 모두 깨끗하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자 예전으로 돌아가버린 나의 기분은 놀랍게도 우울하다. 믿어지는가? 암에 걸린 걸 아는 순간부터 오직 한 가지 애타게 완치를 갈구했는데 내가 느낀 건 암에 걸리기 전의 기분이라니!


재밌는 것도, 즐거운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에 걸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는 사는 게 짜릿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투병의 고통 속에 있는 환자들에겐 부럽기 짝이 없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이란 걸 나도 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글을 썼다가 지웠지만 내 마음이 힘든 걸 부정할 순 없다.


항상 유쾌하고 상냥하고 너그럽고 부지런하고 행복한 웃음을 짓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지금은 찌뿌둥하고 무기력하고 심술궂은 내가 있을 뿐이다. 원래 내 모습이던 과거로 돌아간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어쩐지 불길해지기만 하는 내 마음이 그걸 증명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마법이 풀려버린 것일까? 화려한 호박 마차와 고운 드레스가 자정이 되어 누더기로 변해버렸듯이 완치가 되었다고 방심한 순간부터 나를 감싼 환하고 밝은 빛이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춥고 황량한 기운이 덮친 것 같다.


살면서 마냥 즐거울 수는 없겠지만 어두운 기분은 정말 별로이다. 나 자신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못나고 못된 자신이 싫어지고 밉다. 잊고 지냈던 자아가 쓸데없이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걸 방해한다. 그걸 뻔히 느끼면서도 막을 수가 없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언제까지나 즐겁고 신나는 기분이 유지되리라고 믿은 건 나뿐인 것인가? <사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거였어>?라는 간판을 내리고 <사는 건 그저 그런 것>이라고 고쳐 달아야 할 판이다.


세상 사람들이 각자 힘겹고 울적한 삶을 이어갈 때 나 홀로 흥겨운 삶을 살아도 되나 미안할 정도로 암에 걸린 뒤에 로또 맞은 기분(그게 어떤지는 사실 모른다.)으로 살아왔는데 마치 내 껀 줄 알았던 당첨 번호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허망하고 쓸쓸하다.


내 주변에는 완치 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일 년 넘게 고생하고 있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와는 암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달라서 그게 내 경우일 거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완치 후의 마음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았고 암 카페에도 투병에 관한 정보만 있을 뿐이기에 우울증은 환자들만 겪는 것인 줄 알았는데 뜻밖의 복병은 삶의 구석진 어느 곳에든 숨어 있는 것인가.


목표를 이루고 난 다음에 오는 일시적인 허탈함이라고 믿고 싶다. 암 카페에 글을 그만 쓰려고 했을 때도, 집을 다 짓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 심리적인 무기력을 경험한 것처럼 지금 내가 느끼는 것도 오랜 기다림 끝에 목표를 이루고 나니 힘이 풀려버린 마음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 새로 사귄 사람들은 모두 내게 "이렇게 성격이 좋은데 왜 암에 걸렸을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암에 걸리고 성격이 바뀐 거예요."라고 답하곤 했다. 바뀐 성격으로 쭈욱 살고 싶은데 그건 불가능한 것인가?


브런치의 인기 작가들 글은 정말 자상하고 섬세하게 일상이나 심리를 묘사한다. 분량도 넉넉히 읽을 만큼 길고 납득이 충분히 갈 정도로 자세하게 풀어서 쓰기 때문에 좋은 글을 실컷 읽고 나면 이래서 인기가 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된다. 가끔 깨알같이 재미난 표현도 건빵 속의 별사탕처럼 달달하게 박혀있기에 좋은 글은 찾아서 읽기도 하고 구독을 신청하게 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읽고 나면 공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갈 길은 멀고 재주는 미천하니 그동안 암환자로 느낀 놀라운 일상을 글로 표현하려 노력했으나 이젠 암경험자로 예전과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으니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이젠 농사를 지으면서 별다를 것 없이 산다. 올해도 풍작을 기원하며 밭 사진을 찍었다.



호박 모종


   


옥수수를 차례로 심어서 단계 별로 수확할 수 있다.



집에서 발아시킨 땅콩 모종과 직파한 땅콩을 비교 중이다.



머위를 심었는데 옆으로 새끼를 쳐서 내년에는 수확할 수 있겠다.



하지에 캐려고 일찍 심은 감자



남편이 쟁기질로 만들어 준 밭에서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블루베리 다섯 그루 심었다. 역시 내년에나 수확 가능



뒷마당의 꽃밭에서 아이리스와 마가렛



이웃이 준 불두화가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꽃이 활짝~



거실을 가려주는 목재 화분을 남편 지인이 만들어 보냈다.


비 온 뒤의 싱그러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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