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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un 25. 2018

빨랫줄과 가로등

시골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가 쨍쨍한 햇볕에 잘 말라가는 빨래를 바라보는 일이다. 바람결에 살랑이는 뽀송한 수건과 까슬거리는 이불의 촉감은 '이 맛에 내가 시골 산다니까!'라고 꼽는 것 중의 하나가 된다. 하지만 빨랫줄이 없으면 바람에 뒤집어지는 이동 건조대를 자주 바로 세워야 한다. 무거운 돌로 눌러놓으면 되지만 돌이 무겁기 때문에 꼭 지키지는 않기에 이런 꼴이 된다.





작년 가을에 황토방을 짓고 나서 일하시는 분에게 빨랫줄 타령을 했더니 주춧돌 두 개를 구해 주고 가셨다. 그걸 여태껏 두고 보다가 남편이 드디어 현장에서 지지대를 만들어 왔다. 남편은 시설 보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올 수 있지만(그렇다고 직접 하는 건 아니고) 이제야 나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 것이다.



그냥 뚝딱 만들어 온 것은 아니다. 내게 전화로 주춧돌에 박혀있는 기둥의 구멍 간격과 치수를 알려달라고 귀찮게 해서 빨랫줄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어설픈 솜씨로 그림을 그려가며 나사를 넣을 구멍을 남편에게 알려주었더니 정확하게 맞아 끼워졌다.







이제 줄만 사서 매달면 되는데 빨랫줄은 굵은 케이블선을 다는 것이 햇볕에 삭지 않고 튼튼하다고 한다. 전파상에 가면 잘라서 팔기도 한다니 5미터 간격으로 세 줄을 끼우려면 15미터를 구입하면 될 것 같다.



주춧돌을 땅에다 묻고 줄까지 매야 완성이지만 이제 빨랫줄을 허공에 매달고 빨래를 널어볼 수 있게 되었다. 무거운 요나 커다란 이불도 마음껏 햇볕에 쪼일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 빨래집게도 넉넉하게 더 사서 바람에 펄럭이는 수건을 마음 놓고 쳐다볼 걸 생각하니 벌써 흐뭇한 주부의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 집에 필요한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가로등이다. 늦은 밤에 돌아가는 손님을 배웅하려니 주차장이 어두워서 불편했는데 얼마 전, 우리 동네에 가로등이 다섯 개가 배당이 되었고 이장이 마침 우리 집 주차장 앞에 있는 전봇대에 가로등을 달아놓고 갔나 보다.



아침잠이 많은 우리 부부는 오전에 별로 일을 못 하니 저녁까지 텃밭에서 일할 때가 있는데 어둑어둑해진 집을 둘러보다 거실 유리창에 비친 가로등 불빛을 보고 깜짝 놀라 남편에게 "여보! 가로등이 달렸네."라고 큰 소리를 쳤다. 남편도 깜짝 놀라 가로등을 보며 " 어! 진짜 가로등이 달렸네."라며 반가워했다. 시골이 유난히 어둡다 보니 보안상 밝은 가로등이 필요한데 농작물에는 밤새 켜놓은 빛이 좋을 게 없어서 반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 집 옆이 묘목을 키우는 농원이라 그동안 가로등을 달지 않았다는데 이젠 집도 많이 들어서고 진입로가 어두우니 가로등이 하나쯤 있으면 했다.



하지만 역시 가로등이 생기니 어둠은 사라져서 집 주위로 밤새 어슴푸레한 빛이 비친다. 텃밭의 농작물은 다행히 가로등의 뒤쪽이라 직접 빛을 받지는 않는다. 침실의 블라인드와 커튼으로 빛을 가려보려고 해도 충분치 않아서 두꺼운 천으로 바꿔야 하나 생각 중이다. 이젠 보름달의 화사한 달빛도, 멀리서 반짝이는 별빛도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가로등 때문에 암흑의 무서움은 덜었지만 깜깜한 밤의 낭만도 사라졌다. 그래도 혼자 자는 날이 많은 시골 생활에 든든한 파수꾼 같아서 도로 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골집에 오는 손님은 부쩍 줄어서 밤에 주차장을 쓸 일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



산 중턱에 사는 이웃 언니가 이십 여일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이가 드니 힘이 들어서 여행도 못 하겠다며 시차 적응으로 며칠 동안 집에서 꼼짝 않고 계시다가 나에게 그동안 물 주느라 수고 많았다면서 콩국수 먹으러 오라고 초대를 하셔서 저녁을 잘 얻어먹고 선물도 듬뿍 받아 돌아왔다.





경사가 심한 산이라 물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어서 평지에다 집 안에 텃밭이 있는 우리 집이 얼마나 수월한지 알게 되었다. 남의 작물에 물을 주는 것과 내 작물에 물 주는 것의 마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싶기도 했다. 훨씬 더 애정 어린 마음으로 물을 주며 '그동안 목이 얼마나 말랐니?' 이러면서 시원한 물을 주면 내 속까지 시원 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키운 작물을 먹는 것이 내 몸에도 더 이롭다는 걸 나는 믿게 되었다. 내가 자주 가던 용문의 레스토랑 사장님의 추천으로 읽은 <아나스타시아>에 나오는 내용이다.



서울의 밤은 덥고 시끄럽다.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한 시골에 있다가 도시로 나오면 우선 차 소리가 시끄럽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답답하다. 이제 나는 시골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도시에서 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괴로우니 틈만 나면 시골에 갈 생각에 딸들과 남편이 나 없이 불편하게 사는 것도 돌아봐지지가 않는다. 슬슬 시골로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 할 듯싶다.  



접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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