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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Sep 27. 2018

달라진 명절

산에서 본 보름달

결혼한 후부터 이십 년 동안 명절을 큰집 부엌에서 보냈다. 살림 규모가 큰 집의 부엌 바닥에서 대여섯 시간 동안 전을 부치고 나면 눈은 침침하고 온몸이 저려왔지만 아무도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함에도 며느리와 아랫동서 역할에는 예외가 없었다. 모두가 당연한 줄 알고 지냈던 세월이었고 무서운 시어머니와 시어머니보다 맵다는 동서 시집살이가 은근했기에 어서 명절이 지나가고 친정에 갈 생각만으로 편치 않던 시간들을 버텼다.  


이제는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큰집 형님은 나이가 많아진 데다 음식 솜씨 좋은 며느리가 들어오고부터 마침내 우리 부부는 명절에 민족 대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팔자 좋은 신세가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몇 달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져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고 나니 친정에도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친정 엄마는 오히려 홀가분해하며 그동안 모시던 제사도 절에 올려버려서 차례 음식이 없으니 딸들이 보낸 음식으로 명절을 보내게 되어 무척 편하다고 하셨다.


여동생은 성격이 어찌나 싹싹하고 유쾌한지 팬이라고 하며 요리를 해서 갖다 주는 동네 아주머니가 계셔서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생일 때나 명절이면 그 집 음식으로 지내왔다. 여동생은 영양제나 상품권 등으로 답례를 한다고 했는데 친정 엄마는 여동생이 가져다주는 그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에 늘 탄복해마지 않는다. 나는 굴비와 장아찌를 비롯해서 첫째가 직장에서 추석 선물로 받아온 소소한 생활 잡화를 엄마에게 보내드렸다. 이래서 딸은 많을수록 좋다는 게 우리 엄마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연휴가 시작되자 남편은 여름 내내 쉬지 않고 일해왔던 피로가 쌓여 양평의 시골집에서 먹고 자며 쉬기로 했다. 서울에 남은 딸들을 위해 시장을 세 번이나 봤지만 정작 우리가 먹을 것은 따로 장을 보지 않고 무작정 시골에 도착했다. 밭에서 딸 수 있는 건 고추밖에 없어서 그걸로 고추전을 하고 집에서 챙겨간 반찬 두어 가지로 초라한 밥상을 차려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추석 전날, 이웃들로부터 반찬, 송편, 단호박, 배, 견과류 등 온갖 먹을 것을 선물 받아 풍성하게 먹었다. 명절 선물로 우리가 준비한 것은 수확한 땅콩이었다. 작년에 비하면 수확량이 가뭄과 폭염으로 삼분의 일 밖에 안 되는 땅콩이었기에 정말 귀한 것이었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땅콩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나누어드렸다. 이웃들도 우리 집에서 농사지은 땅콩을 무척 맛있어했기에 땅콩을 키우지 않는 그분들에게 깨끗이 씻어서 또는 삶아서 드리고 나니 과일 상자를 사서 드릴 때보다 훨씬 뿌듯했다. 아무래도 내년엔 밭에 다른 작물 포기하더라도 땅콩을 좀 더 심어야 할 듯하다.


남편은 그야말로 먹고 쉬며 허리가 아프도록 자면서 피로를 회복했다. 남편이 나흘 동안 한 일이라곤 마당의 잔디를 깎고 땅콩을 뽑기만 했을 뿐, 나는 뒤뜰의 꽃밭에 잡초를 뽑고 기계로 밀고 난 가장자리의 잔디를 가위로 자르고 뽑은 땅콩에서 땅콩 알을 떼어 씻어 삶았다. 세 끼 식사를 차려댄 건 별도로 하고도 말이다. 직장에 다닐 땐 그래도 명절 보너스가 나와서 좋더니 온전히 주부가 된 후부터는 연휴란 모두 몇 끼의 식사를 차려내야 하는가를 계산하게 되는 업무의 연장이라고나 할까?


추석 다음날에는 이웃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명절에는 탕, 나물, 생선 세 가지가 기본이라며 노래를 부르던 남편은 얼씨구나 하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입담 좋은 내 덕분에 이웃집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다며 전에 없이 칭찬까지 했다. 음식이 정갈하기로 소문난 이웃집에 가니 식탁에는 잡채와 조기, 빈대떡, 식혜가 차려져 있었다. 미식가인 남편은 조기를 발라 육개장과 함께 밥을 먹느라 한동안 말을 잊었다. 나도 잡채가 맛있어 두어 점 먹고 나니 더 이상 목에서 내려가지가 않았다. 또다시 위 없는 비애가 느껴졌는데 추워진 날씨에 난방을 하고 문을 꼭 닫아둔 집안 공기가 답답했다. 식사를 할 때 조금이라도 춥거나 덥거나 시끄럽거나 하면 예민한 소장이 음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절반 정도 먹다가 문을 조금 열고 환기를 하고 나서야 남은 밥을 마저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식욕은 사라졌다.


암에 걸리고 나서부터는 내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큰집에 안부 전화를 하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전화를 하지 않았더니 이번 추석에는 목소리 좀 듣고 살자는 말씀을 큰집 형님이 하셨다. 가까이 사는 시누이에겐 추석 선물을 드리러 찾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왔지만 예전 같으면 땅콩을 제일 먼저 드렸을 텐데 우리 먹을 것을 줄여 이웃에게 선물하고 나니 시누이도 좋아하는 땅콩인데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직 밭에는 몇 포기의 땅콩이 남아 있으나 한 줌의 땅콩은 그걸 캐서 먹으러 오라고 한 암 카페의 회원들이 있기에 일부러 남겨놨다. 시집 식구들이라면 그저 웃는 얼굴로 순종하던 나였는데 암과 세월은 이렇게 나를 뻔뻔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남편은 그놈의 탕과 나물이 그리도 먹고 싶은 모양이어서 오늘은 기필코 시장을 봐서 고기와 해물이 많이 들어가 시원한 탕국과 손이 많이 가는 삼색 나물을 해주기로 했다. 추석 연휴가 다 지나간 다음에 나는 또다시 추석 음식을 해야 하지만 나도 먹을 거니까 맛있게 할 밖에.


산 중턱에 사는 이웃집에서 본 보름달은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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