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부러진 손목
두 손으로 세수하는 일이 감사할 뿐
전날 녹은 눈이 빙판으로 되었던 지난 동짓날 아침,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운동으로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내리막 빙판길에서 뒤로 넘어져 오른 손목이 조각나며 부러졌다. 뒤로 천천히 미끄러졌기에 어느 손을 짚을까 생각하다가 오른손을 선택했다. 내가 칼질을 왼손으로 한다는 건 나중에 떠올렸고 그 순간은 건초염을 앓았던 왼손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너무 추웠던 날씨 탓에 빙판길에 누웠을 땐 그다지 통증을 느끼지는 못했다. 부러진 손목을 받쳐 들고 동네 정형외과로 한참 걸어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의자에 앉았다가 복도에서 기절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통증으로 인한 쇼크라고 의사가 설명했는데 수액을 두 팩 맞고 나니 혈색이 돌아왔다. 집에 있는 딸들에게 연락해서 병원으로 오게 하고 입었던 옷은 가위로 팔 부분을 잘라야 했다.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에 주말을 보낸 후 집 근처의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이틀을 입원했다. 조각 난 손목뼈에 금속판과 철심으로 고정하니 세 군데로 절개한 흔적이 남았다. 마취가 풀릴 때가 되니 뼈 저린 통증이 어떤 건지 실감했다. 위암 수술로 배를 가를 때보다 더 욱신거리면서 아팠다.
퇴원하고 시작된 일상은 모든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는데 글쓰기, 세수하기, 뚜껑 잡고 돌리기 같은 행동을 할 수 없고 두 손으로 해야만 하는 설거지 같은 집안일은 한 달 동안 식구들 차지였다. 팔이 부러진 걸 아는 이웃들이 국을 한 냄비씩 끓여 가져다줘서 일주일은 그걸로 밥을 먹었다.
딸들과 남편이 나의 지시 아래 반찬을 만들고 식탁을 차려줘서 처음에는 속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느리고 서툰 솜씨로 그동안 내가 하던 나물과 국을 만드려니 자꾸 채근을 하게 되어 싸울 때도 있었다. 끼니마다 나오는 설거지는 왜 그리 많던지 나를 제외한 세 명이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하느라 덕분에 편하긴 했다. 한 달이 지나 깁스를 풀고(금속판과 철심은 6개월이나 일 년 뒤에 제거한다고 했다.) 손가락이나마 자유로워지자 조금씩 집안일을 하게 되어 이젠 요리도 하고 어설프게 설거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지 않는 뻣뻣한 손목으로 세수를 하려니 불편하긴 해도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을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왼손으로 포크를 사용해 밥을 먹다가 오른손으로 반찬을 집어 왼손으로 옮겨 먹게 되어 밥 먹기가 훨씬 수월하다. 손목이 좌우로 회전이 안 되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는 건 가능하나 입으로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편한 손목으로도 밥을 먹겠다는 의지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앞만 보고 달리던 급한 성격에 부러진 손목은 천천히 가라는 뜻인 듯해서 강박적으로 하던 운동도 한 호흡 쉬면서 차근차근하고 있다. 체중이 자꾸 줄어서 식사량도 조금씩 더 늘리고 있다. 혈당이 오를까 봐 더 먹고 싶어도 참았는데 설 즈음부터 잘 먹기 시작해서 지난달에는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몇 년 만에 가족 여행을 가서 더욱 잘 먹었더니 체중이 다시 늘었다.
손목 때문에 가족 여행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의사가 한 달 지났으니 다녀와도 된다고 했고 위약금이 있어서 붕대를 친친 감은 손목으로 해외여행을 감행했는데 매 끼니 잘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보니 호강한 셈이라 좋았다.
병원으로 소독하러 하루 걸러 갈 때는 모르는 사람들이 팔걸이를 한 내 모습을 보면 문도 열어주고 옷도 입혀주는 등 참으로 친절하게 굴었다. 동정받고 보호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일부러 옷 밖으로 깁스를 하기도 했다.(요즘은 석고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찍찍이로 풀었다 꼈다 할 수 있다.)
손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지만 여전히 나는 명랑한 기분으로 지낸다. 몸에 이롭지 않은 음식을 잔뜩 먹고 늘어져서 무기력하게 보냈던 지난날에 비해 현미채식으로 건강식을 시작한 이후부터 날마다 의욕이 넘치고 기운이 있어서 즐겁게 지낸다. 집을 떠나면 예민해진 장 때문에 화장실을 못 가서 몸이 무겁고 활력이 확 줄어드는 걸 느끼고 나니 소박한 식사와 때마다 하는 운동의 효과를 절감할 수 있었다.
자연식물식으로 건강과 미모를 회복한 첫째 딸의 말을 언제나 되새긴다.
'입이 원하는 것이 아닌, 몸이 원하는 것을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