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해 놓은 부동산에서 전세가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서른이 된 첫째와 두 살 터울의 둘째를 집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근처에 적당한 오피스텔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동네의 부동산에 말해둔 터였다. 집과 한 정거장 차이라서 너무 가까운 단점이 있지만 아파트처럼 되어 있는 내부여서 살림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는 분이 살고 있는 곳이라 믿음이 갔다.
그런데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아 나온 건물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대신 지인의 오피스텔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아담하지만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있어서 딸 둘이 살기엔 무난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한번 둘러보겠냐고 물어보았다. 얼마 전까지 집이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된다고 독립의 의지를 밝혔기에 당연히 동의할 줄 알았는데 누군가로부터 안정된 수입이 없을 때 집을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돈이 없어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성인이 된 딸들과 좁은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함께 지내는 일은 모두에게 인내심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부부는 소리를 적게 내면서 아침을 먹고 티브이 소리를 줄이고 대화를 살살한다. 딸들은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내가 없을 때만 거실에 나와 지낸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딸들과 분리하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전세로만 삼억 가까이 내놓은 집이라 월세와 나눠도 그만한 돈이 없는데 딸들은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해결 방법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나왔다. 추위가 가시고 따뜻해지자 둘째가 언니에게 시골집에 가보자고 먼저 제안했나 보다. 둘이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이 걸려 시골에 가더니 며칠씩 지내는 것이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은지 매주 월요일이면 짐을 싸서 시골로 간다. 삼사일 정도 지내다 주말이 가까워오면 친구들과 약속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몇 주나 계속되고 있다.
딸들이 떠난 아파트에서 나는 자유를 누리며 즐거운 일과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집안일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남편과 마음 놓고 얘기하고 티브이도 크게 틀어서 보니 세상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완전 채식을 하는 딸을 위해 나물 서너 가지를 기본으로 만들고 입맛 나는 음식을 해주고 싶어서 날마다 시장을 보다가 갑자기 한가해져서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도 생겼다.
시골집에 가면 딸들은 직접 요리해서 며칠씩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데 차도 없이 시장을 봐서 마을버스를 타고, 사다 놓은 재료 안에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니 상당한 계획이 필요하다. 반년 이상 자연식물식을 실천하며 요리를 하던 딸들은 내공이 점점 높아져 마트가 없는 시골 살림도 너끈하게 해내는 게 신통할 뿐이다. 식사 준비만 힘든 건 아니다. 점심을 먹고나서 저녁이 될 때까지 시골의 고요한 오후가 얼마나 심심한데 어쩌다 둘이서 동네 카페를 갈 뿐, 뭘 하는지 바쁘게 지내는 듯하다.
시골집을 지은 건 내 인생에 세 번째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첫 번째로 순위를 바꾸고 싶다.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지은 시골집이 이제 와서 우리 가족에게 이렇게나 필요한 공간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딸들이 머지않은 장래에 독립을 하겠지만 그때까지 나물 요리를 함께 먹으며 자연식물식을 해야 한다.
엄격한 현미 채식 식단을 유지하는 딸이 없으니 느슨해진 나는 남편까지 퇴근이 늦은 날, 저녁을 내 맘대로 먹었다가 식후혈당이 치솟는 경험을 했다. 두툼하게 자른 통밀 식빵 두 장을 굽고 양배추를 달걀물에 적셔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딸이 남기고 간 고구마 반 개를 더 먹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식후혈당을 관리하려면 채소를 먼저 섭취한 뒤 단백질과 탄수화물 순서로 먹어야 천천히 혈당이 오른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하고 한 시간 뒤 혈당을 재니 여태껏 보지 못한 높은 수치가 나왔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서 뜀박질을 하다가 계단을 오르고 스쿼트까지 하고 나니 비로소 혈당이 안정되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우리 집의 첫째가 없으니 바로 느슨해지는 식단으로 아닌 밤중에 혹독한 체험을 하고 나니 함께 사는 딸의 존재가 절실해졌다. 다음 날은 나물 요리를 서너 가지 만들어서 반찬부터 먼저 먹은 후 현미밥 반공기를 먹으니 두 시간 뒤에 측정한 식후 혈당은 다행히 정상 수치 범위 안에 들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아웅다웅 지내지만 당분간은 바른 식습관을 위해서 딸들과 동거를 지속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정 힘들면 시골집으로 가면 되니 내 인생 첫 번째로 잘한 일이 맞다. 원래는 남편과 결혼한 일이었으나 삼십 년 살고 나니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지금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소중한 딸들이 내일이면 집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