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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Apr 05. 2023

들꽃 원피스

도시의 봄과 시골의 봄

내 옷장엔 들꽃무늬의 리넨 원피스가 있다. 세 번의 봄을 지나면서 한 번도 입지 못하고 있다가 올해 봄날엔 마음껏 입으면서 돌아다니는 중이다. 벚꽃이 활짝 펴서 나가고, 벚꽃이 져서 꽃비가 날려 또 나가고 시골이 아닌 도시의 봄을 누려보니 이 또한 즐겁다. 해마다 봄이 오면 시골집 마당에서 차례로 피어나는 꽃을 보며 좋아했는데 도심의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즐기는 맛도 어째 점점 더 좋아진다.


봄이 되자 시골집의 뒷마당에 있는 노란 수선화가 가장 먼저 꽃대를 올리고, 은은한 연보랏빛의 토종 야생화인 깽깽이풀이 작년보다 많은 꽃봉오리를 방싯거렸다. 그리고 진한 보랏빛 앵초가 뒤를 이어 꽃망울을 품는다. 나무 중에는 살구꽃이 제일 먼저 피고 매화도 눈을 환하게 밝혀준다. 해마다 반복되는 봄꽃의 순서이건만 볼 때마다 신기하고 반갑다. 예쁜 건 항상 좋은 법이니까


수선화와 앵초
작년보다 꽃대가 늘어난 깽깽이풀
깽깽이풀의 연보랏빛은 환상적이다.


주중에는 딸들이 시골집에 가니까 나는 주말에만 잠깐씩 간다. 야생화는 피었나 싶었는데 일주일이 채 가지 않고 금세 져버려서 더 아쉽다. 꽃은 잠깐씩 보고 밭농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왔다. 틀밭에 퇴비를 부어 일주일 두었다가 호미로 슬슬 뒤집어 상추씨를 뿌리고 완두콩을 심었다. 옆 밭에는 남편이 삽으로 두둑을 뒤집어줘서 흰 감자와 자색 감자를 심었다. 토종 오이씨와 호박씨도 한 곳에 잘 묻어 두었다가 나중에 옮겨 줄 예정이다. 삭아버린 옥수숫대를 뽑고 거기엔 딸이 잘 먹는 고구마를 올 해엔 많이 심어야 한다.


이 일만 하고 돌아와도 안 하던 노동이라 그런지 피곤했지만 갑자기 잡힌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 다음 날 또디시 들꽃 원피스를 입고 외출했다. 봄이 되면 시골이 제일 좋은 줄 알았더니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고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때가 흙을 만지며 노는 밭일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나다.


평소엔 엄격한 식이와 운동을 하느라 정해진 음식과 일정대로 움직이는데 약속이 있는 날엔 외식도 하고 카페에서 달달한 간식도 먹었다. 같은 당뇨 전단계인 지인과 만나서 식당을 정하기로 했지만 식후 혈당이 높은 내당능장애인 나보다 공복 혈당만 약간 높은 지인은 평양냉면을 그렇게 좋아한다. 을밀대 본점에서 파는 냉면을 먹으러 함께 갔다. 나는 겨울에만 파는 줄 모르고 국밥을 먹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양이 적을 것 같은 사리를 시켰다.


9개월 동안 한 번도 먹지 않던 냉면을 먹고 그전에 연남동의 유명한 벚꽃집에서 단 맛의 벚꽃 라테와 브라우니까지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분분하게 날리는 벚꽃에 기분까지 날리는지 혈당이 그다지 오르는 느낌이 없었다. 예쁜 꽃비가 바람에 흩날리는 2층의 테라스에 앉아 그림 같은 플레이팅을 보며 봄날을 만끽하니 혈당 걱정은 저만치 물러가고 그저 즐겁기만 했다.  


연남동 벚꽃집이라는 핫한 카페의 내부



당류가 포함된 것과 빵떡면을 저승사자 보듯이 무서워하며 피했는데 기분 전환을 위해 한번쯤 일탈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운 하루였다. 암 환자들은 정기 검진을 무사히 통과한 날에 참았던 불량 음식을 먹고, 다이어터들도 주말은 치팅 데이라고 치킨을 뜯는데 당뇨인들은 한 끼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많이 달지 않은 브라우니 한 조각과 살짝 단 맛이 나는 벚꽃 라테 그리고 밍밍하지만 조금씩 맛이 느껴지는 메밀 냉면은 기분 좋은 일탈이었다. 이렇게 몸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입이 즐거운 음식을 먹는 것은 억눌렀던 긴장을 풀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라 아주 가끔씩 해보기로 했다.


딸이 하고 있는 건선 식습관 코칭 sns에는 다양한 댓글과 사연이 달리는데 딸은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어떤 댓글에 '질병의 고통에는 경중이 없다.'라는 답글을 썼다. 암을 지날 때는 죽음의 공포에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당뇨를 겪어보니 끼니마다 투쟁하며 먹고 운동해야 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가려운 피부병은 밖으로 노출되어 외출이 꺼려지기도 하니 어느 병인들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가급적 자연에 가까운 음식을 섭취하고 초가공 식품을 멀리하며 먹고 나면 움직여주는 운동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야말로 건강을 원한다면 가장 기본인 것 같다. 우리 집은 식습관을 완전히 바꾸고 나서 집안 분위기도 밝아졌다.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냉장고, 나물 반찬과 쌈채소가 충분히 차려진 식탁, 대화를 하며 천천히 식사에만 집중하는 시간, 새로운 채식 요리를 함께 의논하며 만드는 일상이 평화롭고 유쾌하다. 좋은 재료로 여러 가지 요리를 잘 먹는 일은 건강하고 행복한 나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 저녁은 텃밭에서 가져온 쪽파와 머위, 달래, 홋잎나물, 엄나무순과 비트장아찌로 봄기운이 풍성한 나물 밥상으로 먹었다.


이 비가 그치면 시골집에는 꽃과 싹들이 일제히 솟아오를 것이다.

   

우리 동네 거리에서 본 능수홍도화. 한 나무인데 색이 다르다. 영춘화나 수양벚꽃처럼 늘어지는 꽃은 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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