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로 소스 없이 과일과 채소를 먹은 지 일 년이 넘었다. 처음엔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끼얹어 먹었으나 과일과 함께 먹으니 소스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손으로 집어 먹는 게 재미있어서 젓가락 없이 먹기도 한다. 내일 아침에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 없이 정해진 식단으로 차려 먹는 단순함이 좋고, 식사 시간이 되기 삼십 분 전에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들을 썰어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담기만 하면 되니 간편해서 좋다.
이렇게 샐러드로 아침을 시작하면 무엇보다 오랜 변비가 사라져서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실제로 살이 빠져서 날씬해졌다. 쌈채소, 바나나와 사과 반 개, 토마토, 그린키위, 파프리카를 담고 계절 따라 블루베리나 밭에서 딴 오이를 추가로 해서 먹는다. 이렇게 먹는 샐러드는 맛있고 상큼해서 아침식사로 적당하다. 채소-단백질-탄수화물 순서에 따라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어 끓는 물에 넣어 9분 동안 삶아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삶은 달걀을 두 개 먹는다. 집에서 만든 콩물을 먹고 그래도 배가 덜 차면 통밀빵 한쪽을 먹기도 하지만 대체로 콩물까지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는데 삼십 분이 걸린다.
일 년이 지나 여름이 되자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열이 많은 체질로 더위를 심하게 타던 나는 옷을 입는 게 두려울 정도로 여름을 무서워한다. 덥고 답답한 것을 참지 못해서 항상 창문을 활짝 열고 아파트 현관문도 일어나자마자 열어둬서 맞바람이 치게 한다. 무릎이 보기 싫어도 여름엔 늘 짧은 반바지와 아주 얇은 면티를 교복처럼 입었다. 날이 더워지면 올여름은 또 어찌 보낼까 싶어서 울적해질 정도로 나는 여름이 덥다.
그런데 폭염이라는 올여름이 의외로 견딜만하다. 햇볕이 따끈따끈한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예전처럼 무섭지가 않다. 식후 걷기를 조금 줄여서 계속하고 날마다 장 보러 가는 일을 힘들지 않게 하고 있다. 내 체질을 닮은 딸도 그러하다고 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채소가 찬 성질이라 꾸준히 먹으면 몸의 열을 내려준다는 설명이었다. 여름이 싫다 못해 괴롭던 나에게 채식으로 이런 변화가 생기다니 정말 놀랍다.
키가 160센티인데 식이를 바꾼 후부터 몸무게는 46킬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만 날씬해졌으면 한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항상 통통했는데 내 평생에 살이 좀 찌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게 될 줄이야! 위가 없어도 식탐이 많으면 살이 찌고 배가 나오는 걸 내 주위의 암 경험자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나 역시 항암이 끝나자 살이 다시 붙기 시작해서 수술 전까지 돌아간 건 아니지만 제법 오동통했다. 그런데 당뇨식으로 현미채식과 함께 의사의 충고대로 탄수화물까지 줄이자 뒤에서 보면 이십 대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남이 보기에 살이 없어서 야위어 보이는 것만 아니면 피로를 느끼지 않고 활기가 넘치는 지금의 상태가 상당히 만족스럽다. 어릴 때부터 달덩이 같던 얼굴살이 빠져서 조금 더 찌고 싶지만 풀때기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은 찌지 않고 기운만 넘친다. 고기는 주말 시골집에 가야 남편과 한두 끼 먹을 수 있고 나의 사랑 탄수화물은 이제 나의 왠수가 되어 쳐다보지 않으니 무슨 수로 살이 찔지, 평생소원이 5킬로만 더 찌는 거라던 남편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코스모스같이 가냘픈 여자가 이상형이던 남편도 내가 마르니 드디어 살 좀 쪄도 된다는 허락을 내렸다. 예전엔 남편보다 팔뚝과 종아리가 굵어 민망했는데 일생 '모 아니면 도'로 살아온 나답게 이젠 너무 빠져서 걱정이라고 한다. 다니던 동네 내과에서 6개월마다 당화혈색소 검사를 하기로 했지만 3개월이 되는 9월 1일에 다른 내과에서 검사를 할 예정이다. 수치가 잘 조절되면 식사량을 늘리고 탄수화물도 더 먹는 방법으로 예전의 통통했던 볼살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의 운동과 식이를 지켜본 가족과 이웃들은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며 그렇게 먹는 거 좋아하고 운동 싫어하던 내가 혈당 때문에 이렇게 변화한 걸 놀라워한다. 고기와 술과 매운 음식을 즐기던 딸이 건선으로 좋아하던 음식들을 모두 끊고 곧 신선이 되지 싶을 정도로 나보다 건강한 식이를 하는 걸 보면 역시 딸과 나는 닮긴 했나 보다. 식습관에 대해 딸과 얘기하면서 항상 내리는 결론은 '많이 아파야 변한다.' 그리고 '변한 후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이다.
평생 유지해야 하는 식습관을 바르게 고쳐주고 그걸 바탕으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준 병이 어쩌면 고마울 수 있다. 나는 암이 내 삶을 바꿔줘서 고맙고 바뀐 삶을 고정시켜 주는 당뇨가 고..맙다.
방학이라 시골집으로 놀러온 동료들과 먹은 아침식사
5일,10일에 오일장이 서는 용문장에서 손님들은 12개 만 원에 파는 옥수수를 사갔다. 나는 구경만 했다.
구멍난 밀짚모자는 바람이 통해 시원하다. 향이 진한 박주가리 꽃을 꽂고 찾아간 우리 동네 카페는 계곡이 있어서 주말엔 붐빈다. 동네 주민은 책을 읽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