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여행에 대한 정의는 또 바뀌겠지만
오랜만에 자기 계발서가 아닌 책을 읽었다.
자기 계발서와 자기 계발서가 아닌 책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자기 계발서가 아닌 책은 책장을 넘기다 중간중간 생각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하다. 때문에,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책을 통해 무엇인가 실용적인 것을 얻으려는 시도는 플러스가 되는 독서이지만, 사색을 요구하는 시도는 마이너스가 되는 독서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 계발서에 치중된 독서는 나에게 커다란 습관을 남겼는데, 책을 읽을 때면 펜과 포스트잇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펼칠 때도 당연히 볼펜과 포스트잇이 주변에 구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 밑줄을 그어야 할지, 포스트잇은 어디에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어 갈팡질팡 했다. 우왕좌왕인 상태로 그렇게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어쩌면, 우리는 늘 여행이 가능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종이만 넘겨도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있으니 말이다. 책은 이래서 좋다.
책에서는 호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호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정리한 부분 중 왠지 이 부분이 마음에 꼭 들었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냄새까지 지워야 하니깐 호텔에선 가정집보다 훨씬 독한 세제와 방향제를 쓴다.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맡게 되는 그 냄새, 분명 처음에는 자연의 어떤 향을 흉내냈겠지만, 어느 순간 그 근원을 몰각한 듯한, 아니 아예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이제는 그저 세제와 방향제 냄새로만 지각되는 그 익숙한 향의 습격을 받는다. (중략)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다음날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이전 투숙객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전날 남겼던 생활의 흔적도 지워지거나 살짝 달라져 있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최근의 나의 여행도 호텔 여행이었다. 혼자 떠나는 호텔 여행 말이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인 상태였고, 해야 할 일은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24시간 중 나만의 시간을 도통 가질 수 없는 상황이 2주나 이어지자, 남편도 내 정신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딱 하루만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조식이 가능한, 집 근처의 부담스럽지 않은 호텔을 잡았다.
호텔의 냄새를 맡아봤다. 내가 느끼기에는 대부분의 호텔은 비슷한 냄새를 갖고 있다. 새 것의 냄새다.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리셋된 기분이라서 만족스러웠다.
냄새는 꼭 후각의 느낌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분위기도 냄새의 특징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세련된 냄새가 있고, 여유가 있는 냄새가 있다. 이런 표현을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하튼, 나에게 냄새란 시간과 분위기가 함께 작용한다. 대학 시절, 공강 시간이면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창문을 열어 놓고 새 학기 설레임의 냄새를 맡았고, 발표를 위해 긴장했던 그 순간의 냄새를 맡았다. 어딘가를 걷다 보면, 여행지의 냄새가 났다.
말을 하기 싫어 떠난 여행이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체크인을 하자마자 넘겨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 들어가면, 집중이 잘 된다. 자정이 되어 업무를 마치자 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TV를 틀었다. 늦은 취침을 한 후,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남이 해주는 호텔 조식을 즐겼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했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일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체크 아웃을 2시간가량 남겨두고, 침대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돈만 낭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은 우울해지기도 했다. 충분히 원하던 바를 달성하였지만, 혼자만 누렸음에 괜히 미안해진 탓이었을까.
남편과 아이가 데리러 오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커피와 함께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왜 여기에 왔을까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밖에서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꾸 죄책감이 드는 여행이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떠난 여행이었는데, 더 큰 올가미에 꽁꽁 묶여버린 느낌이다. 잠깐 홀가분했지만, 홀가분한 마음을 경험한 탓인지 다시 마주한 현실이 더 버겁다. 리프레시는 리프레시의 순간에만 느끼는 것일 뿐이다.
어차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일 뿐이었는데, 나는 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 것을 왜 여행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혼자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평소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챙겨야 할 사람도 상황도 없이, 나만 생각하면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다면, 나름 여행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엄마라는 내 상황에서는 그렇다.
내가 시간과 분위기와 함께 냄새를 맡듯이, 나에게 여행은 그저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면, 그게 여행의 시간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여행의 기분을 탑재한 상황에서, 종종 문학 책을 집어 들고자 한다.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책장을 넘기다가 잠시 생각에 빠지는 것, 빨리빨리의 촉박함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 느낌에 빠져보는 것 등을 ‘지식을 쌓아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내 마음대로 누려보고 싶다.
책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진부한 문구도, 사실 진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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