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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Oct 16. 2019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사피엔스]를 읽고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우리가 알고 있는 공주 이야기는 으레 이런 문구로 끝을 맺는다. 당연히 해피 엔딩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래야만 하기도 하다. 동화 속 공주들은 늘 불행한 과거를 겪는다. 공주가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동안의 갖은 수모와 고생들을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이란 말인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우리란 인간들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 역시 온갖 고생과 시행착오들로 가득하다. 이쯤 되면 우리도 모두가 행복이라는 가치를 누리며 살아도 될 법하다. 시련의 시간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그만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의 주인공이 되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행복한 결말을 누리기 위해 이제까지 모든 인류가 성장의 폐해를 감수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135p


사회의 규율을 성실한 자세로 따랐을 뿐인데, 이것이 우리 스스로를 더욱 얽매이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니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에 잠시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니라고 발버둥 치고 싶으면서도, 어느 정도 사실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업그레이드 된 사치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더 이상 20대가 아닌 만큼, 신제품을 사용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필수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필수품으로 만들어버린 이 것들이 없으면, 주변과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만다.


따라가기 벅차기만 한 신기술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피로감마저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준다고 믿어지는 기술의 발전에 마냥 감사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새로운 기술은 겨우 익숙해지기가 무섭게 구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현재의 구성원도 따라가기 힘든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기원후 1000년 어느 스페인 농부가 잠이 들어 5백 년 후에 깨어난다고 하자. 그는 콜럼버스가 이끄는 니냐 호, 핀타 호, 산타마리아 호의 선원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깼다. 그렇지만 그가 깨어난 세상은 매우 친숙해 보일 것이다. 기술과 풍습과 정치적 경계선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중세의 이 ‘립 밴 윙클’은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콜럼버스의 선원 중 한 명이 같은 식으로 잠에 빠졌다가 21세기 아이폰 벨소리에 잠을 깬다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여기는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 350p


게다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거대한 구호 속에 감춰진 많은 이들의 짓밟힌 삶을 우리는 무시해 왔다. 이 점 때문에라도 우리 스스로에게 행복한 인류라는 타이틀을 줄 수가 없다. 소수만 누리는 행복을 모두가 누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의 행복과 더불어 개인 역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사피엔스]에서 언급하는, 유럽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다른 지역을 제치고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과학자와 정복자는 둘 다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들은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둘 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새로운 지식이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기를 둘 다 희망했다. -401p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기에는 억지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모두의 행복과 함께 개인의 행복도 함께 가져갈 수 있으려면 개인 역시 저 시대의 과학자와 정복자처럼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계속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움직이는 자만이 평균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여러 책을 통해 이미 확인이 가능하다.


우리의 이야기인 사피엔스의 역사를 현재까지만 이해한다고 해도 큰 숙제인데, [사피엔스]는 더 거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사피엔스의 역사 상 가장 빠르고 급격한 과학의 발전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획기적이고 얼마나 더 가파르게 지구의 질서를 어지럽게 해 나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20장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편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고 지구의 생명을 설계해 나가는 모습의 이야기는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을 때처럼 무섭고 걱정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참고: [마음의 미래]를 대하는 내 마음의 미래)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586p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를 고민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원하는 것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아니,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여전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정 속에서는 아무것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완전히 밖으로 나와 제3의 입장이 될 수 있어야만 제대로 들여다보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원하고 싶은지는 호모 사피언스의 존재로 남아있는 이상 영원히 모르는 상태로 남아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지금의 방향이 진정 인류의 행복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열심히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슬퍼지기도 한다.


우리의 후손들 어쩌면 인류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우리의 후반부를 평가할 때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고 표현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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