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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Sep 29. 2016

종이의 힘을 믿습니다

종이 만지는 일이 새삼스러운 세상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그래도 문서 정리를 위해 프린터를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잉크가 아까워 출력을 거의 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 프린터기 위에는 먼지만 뽀얗게 쌓여가는 중이다. 종이 구입 비용이 없어진 만큼, 종이를 만질 일도 없어졌다.


대학시절까지 차곡차곡 쌓아갔던 다이어리가 필요 없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다. 스마트한 스마트폰 캘린더에 기록하면 되는 것을, 스마트하지 못하게 종이에 적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배우러 가게 되어도 펜을 들고 공책에 기록하는 모습은 희귀해졌다. 모두가 노트북을 켜고 수업을 듣는 세상 아니던가. 연습장? 공책? 수첩? 이게 뭐였지?라는 농담을 하게 될 정도로 종이를 넘기는 일이 어색해지자,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원래도 예쁜 글씨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더 악필이 되어버렸다. 힘들게 암호 코드를 만들 필요 없이, 그냥 내 글씨를 그대로 갖다 써도 괜찮은 수준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펜을 잡는 자세도 불편해졌다. 힘이 많이 들어가서, 조금만 글씨를 써도 금세 팔 전체가 아팠다. 악기 두드리듯 손가락만 현란하게 움직이면 맞춤법까지 체크해주는데, 쓰기도 쉽고 지우기도 쉽고 파일 자체를 저장하거나 삭제하기도 쉬운 기술을 놔두고 왜 힘을 들여가며 글씨를 쓰지? 하는 사이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하나가 쇠퇴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다시 펜을 들고 종이를 찾았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그에 비해 실행하고 있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은 ‘감사일기’ 쓰기에 도전한 것이다.


수첩을 사는데 공을 많이 들였다. 연말만 되면 어떤 다이어리를 고를까 대형서점 다이어리 코너에 서있던, 학창 시절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 책 표지를 그대로 옮겨 온, 두꺼운 표지의 수첩을 선택했다. 늦게 자는 아이의 생활 리듬 탓에 밤에도 같이 잠드는 경우가 많으니, 감사일기를 쓰는 시간은 아침 5시로 정했다. 그렇게 시작한 감사일기는 이제 수첩의 3분의 2를 채웠고,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고요한 새벽,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펜을 들고 있자니, 초반에는 온갖 잡생각이 났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 시간에 왜 일어나 있나,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니 음악이 듣고 싶네, 내일은 무슨 차를 마셔볼까 등 내가 의도했던 대로 시간을 활용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은 어제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했던 일’을 ‘의도적’으로 찾는 일이었다. 어제의 일인데도 억지로 쥐어짜지 않으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태엽을 뒤로 감듯이 의식적으로 하루 일과를 거꾸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내 하루는 마치 영화처럼 다가왔고 제3자의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일기를 쓰려고 했던 결심이 처음엔 후회가 되었다. 나의 아쉬운 행동들만 자꾸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감사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쓰기 시작한 감사일기는, 나의 잘못된 점이 아닌 ‘보완해야 할 점’을 알게 해주셔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였다.


억지로 감사하려고 하니 참 힘들었다. 감사하다고 쓰는 글에 부정적인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된 점'은 '보완해야 할 점'이 되었고, 전반적인 글의 분위기가 온화해졌다. 그리고 펜을 들고 쓰자니 지우기가 쉽지 않아, 틀리지 않으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감사한 내용을 ‘꾹꾹’ 종이에 눌러썼다. 


이러한 과정이 습관이 되기 시작하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감사한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많았다. 심지어, 미팅에 지각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내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타야 하는 버스가 온 것도 감사했다. 한 번은, 데드라인이 지나도록 해결이 되지 않은 건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매우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우연히 관련 공부를 하다가, 내가 생각했던 해결 방안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다른 목표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당시 데드라인이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너무 감사한 일이 되어버렸다. ‘꾹꾹’ 종이에 눌러쓰는 감사한 일이 하루에도 몇 개씩 쌓여가는 만큼, 진짜 하루하루가 감사해졌다. 


물론, 감사한 일이 눈곱만큼도 없는 최악의 날도 있다. 그런 날에는, 속상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찍찍 그으면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심하면서 한 줄 한 줄 쓰다 보면, 가끔은 스스로 해답을 찾게 되는 때도 있다.




한창 힘들다고 생각되었던 30살 때, 내가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사항을 종이에 적어 냉장고에 붙여두었던 적이 있었다. 종이의 상단에는 크게 wish list라고 썼다. 그리고 냉장고에 갈 때마다 wish list를 되뇌었었다. 하루는, 지인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나의 wish list를 보더니만, wish list라는 표현을 order list라고 바꿔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바라는 수준에서 진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수준으로 내 마음을 바꾸라는 의미였다. 


솔직히 그 order list,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 펜으로 꾹꾹 눌러쓴 꿈은 어딘가에 계속 남아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5개월간 꾸준히 감사일기를 써가며 정말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듯이, 그 꿈도 내 노력이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나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이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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