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생이 아니라고 배움의 끝은 아니다_두 번째
아이를 안고 몇십 분이고 거실을 빙빙 돈다. 아이를 재울 때면 의례 하는 행동이지만, 그날은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의 책 제목들에 눈이 갔다. 하나하나 읽어보니, 분명 내 책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책을 읽었었나?’하는 의문이 드는 책들이 꽤나 보인다. 읽었던 적이 있는지조차 헷갈리면서 어떻게 내 책인지 확신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자신 있게 내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매번 책을 살 때마다 속지 첫 페이지에 기록하는 구입 날짜와 ‘지연이에게’라는 글씨 때문이다.
‘지연이에게’라는 문구는 선물 받은 책이냐는 오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실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기록된 날짜는 그 당시 내가 어떤 관심사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마치 일기 같은 느낌이라, 가끔씩 중고책 시장에 판매를 하고자 책을 정리할 때면 망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소설은 책장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미 중고시장에 팔았기 때문인데, 다른 장르의 책들에 비해 유독 소설이 없는 이유는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인 듯하다. 소설은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종종 이런저런 상상과 함께 오랫동안 책을 붙잡고 있기에는 사는 게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가 바로 자기계발서다. 내가 나에게 선물한 자기계발서들은 유독 20대 시절의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감정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한창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고민이 많았나 보다. ‘~해라’고 외치는 자기계발서는 실제 내 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당장에 필요한 답변을 제시하기에, 명쾌한 해답을 찾은 것 같아서 일단 마음이 편했다.
이제 와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다.
학창 시절, 친구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서 접하고는 자주 되뇌었던 문구가 있다. 대략 내용은 이렇다. 내가 10년 전에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지? 5년 전에는? 1달 전에는? 기억이 나지 않지? 지금 하는 고민도 그렇게 지나갈 거야.
그런데 20대에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는지 그 흔적을 자기계발서들로 남기려 한 듯, 책장은 여러 권의 자기계발서와 직장에서 오래 버틴 여성 임원의 에세이가 차지하고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멋진 여성들과는 다른 상황에 처하기도 했고 자기계발서의 지침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부분도 많았음을 안다. 책 제목으로 추측할 수 있는 당시의 고민들은, 나만의 히스토리를 써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부분이 상당 부분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아이도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디딘 만큼 엄마 역시 엄마로서의 삶도 처음이라, 아이와 엄마 모두 생의 새로운 장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아이도 모르고 엄마도 모른다. 똑같이 시작의 출발점에 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엄마 회사’의 신입사원이다. 다만, 일반 회사의 신입사원은 미리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파워포인트나 엑셀 등도 미리 능숙하게 다루는 연습을 하고 소위 스펙을 열심히 쌓는 등 준비를 하지만 (그렇게 준비한다고 해도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엄마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엄마 신입사원의 입장에서 또 다른 자기계발서가 너무나도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당연한 것은, 20대 시절 자기계발서의 명쾌한 답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었듯, 엄마 자기계발서를 많이 접한다고 해서 이 시기가 수월하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신입 엄마들이 주로 접하게 되는 육아 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터지는 사건사고들에 모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없듯이 말이다.
대신, 역시 20대 시절 그러했듯이 조바심 낼 필요 없을 것 같다. 지금 (비교적) 단단한 30대가 되었듯이 단단한 엄마가 되는 토대가 될 테니까 말이다. 엄마라는 직장은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퇴직이 없는 곳이다. 길게 봐야 하는 만큼, 내가 중심을 잡아야 오래도록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중요도를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지혜들이 많이 쌓여 있지 않은가.
막연히 불안하고, 괜히 미안하고, 늘 부족한 것 같아 자책하고 고민하는 거, 그만하자.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서, 이미 충분히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