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억해야 존재하는 우리
사후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는 집에 사는 것도 아니거니와, 밤에 문을 열어놔야 조상님이 음식을 드시러 오실 수 있다거나, 조상님이 살아생전에 좋아하신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 등의 형식들이 흥미로운 전통이라고 생각해 봤을 뿐이다.
얼굴도 잘 모르는 조상님을 복잡한 절차를 통해 기리는 방법에는 거의 무지한 수준이지만, 사실, 마음속으로 그분들을 찾은 적은 있다. 솔직히, 적지 않다.
나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는 분은 내가 찾는 신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아주 어릴 적, 귀찮다고 여겨질 정도로 나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 자랑하시던 나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였을까.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대응하느라 저승의 누군가를 생각할 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지만, 가끔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주름이 잔뜩 덮인 기다란 손가락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놓으시던 기억이 같이 소환되곤 했다.
기억은 지금 당장 내 옆에 없는, 심지어 현실에서는 영영 볼 수 없는 사람과 다시 한번 만나게 해준다. 그렇게 기억은 그리고 생각은 누군가와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그려지는 사후 세계는 기억에 따라 관계가 새롭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이승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는 세대의 세대가 지나도 여전히 많이 기억되는 대스타인 만큼 저승에서도 화려한 생활을 즐긴다. 반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주인공 미구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밝혀지는 헥토르는 지금은 미구엘의 증조할머니인 코코의 머릿속에서만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일 년에 한 번 이승을 방문할 수 있는 ‘죽은 자의 날’, 사진이 없음은 물론이요 아무도 찾지 않아 가족들을 만날 수 없는 영혼들은 다른 영혼들과 비교하여 초라한 생활을 이어간다. 심지어 이승에서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면 초라한 생활마저 이어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기억이 없다면, 육체의 죽음 이후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살아있을 땐, 내가 누군가의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나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든든한 뒷받침이 되고 싶기에, 더 멋진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나는 커다란 나무 같은 존재로 남길 바란다. 너를 위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후에는 반대가 되는 것 같다. ‘코코’의 내용처럼 정말 사후에 또 다른 삶을 이어갈지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가 실제와 같다고 가정한다면, 그때는 내가 매달려야 하는 동아줄이 바로 누군가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나를 위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의 숫자는 기억과는 큰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들 모두 나를 계속 기억할 것이라는 기대는 우습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기억이라면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기억이 중요한 만큼 누군가에게 내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감사하게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과 내가 연결된 삶의 에피소드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지 말이다. 얼굴 붉히는 추억이나 원망스러운 느낌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다.
더욱 내 삶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다.
충실한 삶을 이어가며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라면, 마찬가지로 그 이후에도 아니, 언제가 끝일지 알 수 없는, 누군가 나를 기억하는 그 모든 순간까지 계속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목표 아닐까.
물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매달리기 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중 하나임에는 사실이지만,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사람인지, 어떤 추억을 공유한 사람인지, 함께 얼마나 웃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더 기억이 충만한 사람 아닐까.
서로 기억해야 존재할 수 있는 우리에게, 삶의 목표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