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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Mar 21. 2018

날지 못하는 토끼

토끼는 달리기를 잘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달리기에서 토끼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토끼가 날기 수업을 받으면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들은 날기를 가르치겠다는 일념 하에 토끼를 높은 가지 위에 세워놓고 ‘토끼야, 날아봐! 날아보라니까!’라고 했습니다. 불쌍한 토끼는 가지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다친 토끼는 이제 달리기에서조차 A가 아니라 C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력을 인정받은 덕에 날기에서 D를 받았습니다. 학교는 이처럼 각 과목에서 고른 성적을 받은 토끼를 보면서 자기들의 교육 방법에 대해 스스로 만족했습니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를 관찰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엄마가 생각하는 ‘옳은’ 성격이나 ‘좋은’ 습관을 강요하기보다는, 너를 제대로 아는 일이 엄마의 첫 번째 임무라고 생각했다. 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맞게 너를 지원해주는 것을 부모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너를 잘 지켜보았고, 그랬기에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점점 너의 표정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확신했고,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엄마는 미리 너의 고민을 예상하고 그 상황에 맞는 엄마의 대답을 준비하곤 했다.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했던 너를, 사실은 잘 아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엄마는 유치원 등원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 집은 셔틀의 첫 정거장이었고, 아직 어린 너에게는 셔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단다. 질문을 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아마도 걱정의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의 대답이 의외였다.  


“내가 먼저 타니깐, 가장 앞자리에 탈 수 있어. 나중에 타는 친구들은 다 내 뒤에 타. 그래서 좋아~” 


셔틀에서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엄마의 고민도, 너는 단숨에 날려주었지. 


“그런데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으면 외로워. 새로운 친구가 내 옆에 앉아도 하나도 안 싫은데.” 


너는 셔틀 버스 안에서,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와는 다르게 보고 엄마와는 다르게 생각하면서.


너를 열심히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가 이야기해줄 때까지는 너의 생각을 완벽하게 알기란 어려울 것 같고, 네가 무엇에 재능이 있고 관심이 있는지도 미리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엄마도 이런데, 다른 누군가가 나를 잘 알고 대해주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희망일까. 


상대방은 너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네가 있는 세상 역시 너를 모른다. 때문에 너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어쩔 수 없이 입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원하지 않는 과목도 중요하다는 타인의 기준 때문에 억지로 공부해야 할 테고, 네가 못하는 것임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를 힘들게 하겠지. 그리고 그 상황이 너의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수도 있겠지. 엄마도 지나간 학창 시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힌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일 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에서, 기준은 나 혼자만을 향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너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그 기준에 억지로 맞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날아라’하고 강요하는 탓에 억지로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결국 잘하던 달리기도 못하게 되고, 마지막엔 날기에서 D 학점을 받는 그런 토끼는 절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토끼는 잘 뛰는 동물이다. 날개가 없으니 당연히 날 수도 없지. 토끼 앞에 ‘날지 못하는’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엄마는 글씨를 못쓰는 아이였다. 글씨를 잘 쓰는 너의 할머니는,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하는 엄마를 자주 혼내곤 하셨지. 초등학생 시절 내내 글씨는 엄마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수업 시간에는 무조건 펜을 들어 필기를 해야 하는데, 나만 알아볼 줄 알면 그만인 교과서인데도 예쁘지 못한 글씨를 누가 보게 될까 신경 쓰기도 했단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인정하고 넘어간다. 엄마는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이다. 그냥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못하는 것을 잘하려 스트레스받기보다는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너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을 때, 아무래도 너의 옷이 아니기에 버티기 힘들 것이다. 남들은 잘 버티는데 혼자만 힘든 것 같은 느낌이 나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기도 하겠지. 그런데 감사하게도, 보편적 기준에 만족시키지는 못해도 자신의 ‘특별한 점’을 살려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많단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나를 잃지 않는 연습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네가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너를 평가하고, 좋지 않은 점수를 줄 것이다. 여기서 나를 잃지 않으려면, 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지키려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것이 좋다’는 모두의 기준과 나를 비교하며 '날지 못하는 토끼'로 낙인 찍히기 보다는, ‘점점 더 달리기 실력이 늘어만 가는 토끼’로 성장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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