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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Jun 12. 2018

행복을 기억하지 말고 기록하기

잠깐 머릿속을 스친 소재는 매우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곤 한다. 신발 끈을 묶기 시작할 때 언뜻 생각난 괜찮은 소재가 신발 끈을 다 묶고 나니 감쪽같이 사라져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적이 있다. 오전 내내 도대체 내가 그때 생각해낸 게 뭐였는지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다시 생각해낼 수 없었다. 지금도 그게 뭐였는지 모른다. 가끔은 그런 일을 겪은 뒤에 겨우겨우 그걸 다시 떠올렸지만 다시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쓴 것에 비해 별로 좋은 소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무척 허무해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떠오른 소재는 반드시 어딘가에 메모해두어야 한다. 생각보다 소재에 대한 생각은 아주 쉽게 잊힌다. 

- 곽재식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늘 작은 수첩을 갖고 다니곤 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유난을 떨지는 않았다. 시작은 이랬다. 어디선가 부록으로 받은 작은 수첩이 있었는데, 얇고 크기도 작아 부담 없이 가방에 넣을 수 있었다. 얼마나 작은가 하면, 같이 넣는 볼펜보다 키가 작았으니 말이다.  


이 수첩의 역할은 다름 아닌, 너의 ‘말 기록장’이었다. 아이들은 모두가 창의적인 카피라이터인가 보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거센 바람을 대하면서 “바람아~ 왜 날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꽃들을 보면서 “꽃이 없으면, 사람들이 울어.”라는 등 엄마 마음을 심쿵 하게 만드는 말들을 계속 쏟아냈으니 말이다. 저녁이 되어 너를 재우고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면, 이상하게도 그 순간 네가 했던 맛깔난 표현과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기에는 자꾸 구멍이 뚫렸다. 기억해내지 못한 단어를 엄마의 양념으로 덧칠한 말을 하면서, 뱉어놓은 말을 다시 삼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를 연발하는 너의 말은 엄마에게 행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복을 기억 속에서만 담고 있기에는 곧 잊힐까 두려웠다. 사실, 엄마의 기억력은 엄마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면 공부도 끝내주게 잘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은근히 늘어나는 손가락 주름과 기억력이 자리를 바꿔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적었다. 네 앞에서는 가능한 핸드폰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엄마만 알아볼 수 있는 악필임에도 불구하고 적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가끔 너의 할머니와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하나의 일을 서로 너무나 다르게 기억하고 있음을 느끼며 깜짝 놀라곤 한다. 기억은 다시 소환되는 순간, 현재의 느낌에 따라 재편집된다. 소환되면 될수록 버전 2, 버전 3의 기억이 된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자료를 계속 수정하고, 파일 이름을 ‘엄마 기억_ver.1’, ‘엄마 기억_ver.2’, ‘엄마 기억_ver.2_1’, ‘엄마 기억_final’로 고쳐가며 만들어진 ‘엄마 기억_final_진짜’는 정말 마지막으로 간직해야 할, 더 이상 고칠 필요가 없는 결과물일 테다. 하지만, 기억은 버전의 숫자가 커질수록 더 이상 간직하고 싶던 그 기억이 아니다. 


가능한 오리지널 버전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행복의 ‘원본’을 갖고 싶었다. 너의 말을 적는 것은 엄마의 행복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와 관련된 행복을 기록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수첩이나 일기장에 써 내려가는 행복은 점점 범위가 넓어졌다. 너만을 향한 행복에서 온전히 엄마가 느끼는 행복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엄마가 기록하는 엄마의 행복은 거창하지는 않다. 하늘의 색깔이 정말 하늘색이고 구름이 정말 쨍한 흰색인 지금도 행복하다. 오늘은 그렇게 눈이 행복한 날이다. 맑은 하늘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었으니, 지금 같은 하늘이면 정말 행복하지.  


너의 행복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감정일 것이다. 꼭 거창한 이벤트가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 행복이라면, 행복은 연중행사 같은 것이겠지. 그런 삶은 너무 삭막하다. 갑자기 네가 내뱉은 말 한마디가 엄마에게 행복이었듯, 너에게도 행복은 그렇게 소소하게 다가올 것이다. 소소하게 모인 행복한 감정이 쌓이면 늘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 소소하다고 하찮게 여기면 행복도 잊히기 마련이란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행복의 순간이라도, 기억하려고만 하지 말고 어딘가에 남겼으면 좋겠다. 나중에 다시 들춰보더라도 오리지널 버전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말이다. 


나중에 너의 행복 기록 수첩이 꽉 차면, 엄마한테도 얘기해주면 좋겠다. 언제나 같이 웃어줄 준비는 이미 돼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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