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팠다'. 요즘도 도장을 판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웬만해서는 서명을 하는 요즘 나는 새 도장을 팠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도장을 판 건 아니다. 몇 주 동안 띄엄띄엄 인터넷 사이트를 뒤진 끝에 마음에 드는 온라인 스토어 한 곳을 골랐고, 서예와 캘리그래피를 하신다는 주인장(혹은 직원)과 카톡 상담을 한 뒤, 고민을 끝내고 도장을 '주문'했다. 대추나무에 한자로, 도장 '印'자는 빼 달라는 요청도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엄마한테 선물 받은 하얀 뿔 도장을 써 왔다. 가을에 있는 어느 공휴일에 엄마랑 모처럼 외출을 했는데,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엄마는 읍내 도장집에 들어가 천 원짜리 나무 도장이 아니라 만 원 넘는 뿔 도장을 파 주셨다. 그때는 한글로였다.
사실 어느 때부턴가 도장 대신 서명을 썼으므로 딱히 도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1년에 한 번씩 계약서를 갱신할 때는 그마저 전자 서명을 썼으니 중요 문서에 손으로 서명을 한 지도 오래다. 그래도 도장은 왠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 같아서 주머니에 넣어 얌전히 보관은 하던 터.
그런데 이번 계약서부터는 꼭 도장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명은 아무 준비 없이도 할 수 있지만, 도장은 준비 과정이 있어야만 찍을 수 있는 법.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서명조차 정자로 또박또박 적는 분도 계셨지만, 나는 도장집 열고 도장 뚜껑 열어 인주를 묻힌 뒤, 이름 석 자가 제대로 나타나도록 균일한 압력을 가해 종이에 '꾹'하고 도장을 찍고 싶었다. 아무리 편안하고 여유롭고 싶어도 결국은 책 한 권의 무게를 실감하며 진지하고 엄숙해져 버릴 텐데, 혹시 나름의 의식 같은 그 준비 과정 중에 도장이 일부나마 무게를 좀 가져가 주지는 않을까? 도장이 거둬가고 남은 무게만으로 나는 날듯이, 까지는 아니라도 조금 더 사뿐사뿐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새 도장을 질렀다.
주문한 지 나흘이 지나, 계약서보다 도장이 먼저 왔다. 택배 상자를 뜯고, 먼저 크기에 놀랐다. 요즘 도장은 이렇게 크게 나오는 모양이다. 거짓말 조금 많이 보태면 마늘 찧는 도깨비방망이 만하다. 이걸 원하는 자리에 잘 찍어야 하니 종이만 보이면 도장 찍는 연습을 했다. 꾸욱. 골고루 힘이 퍼지도록 지긋이. 일기장, 다이어리, 애들 공책, 우편물, 이면지, 보이는 대로 찍어 보다가 작은율이 다 쓴 연습장을 버린다길래 마지막 장에 기념으로 하나 찍어 줬다. (버린다는데 기념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택배로 계약서가 왔다. 도장 찍는 데가 한 곳뿐이라 아쉽다. 한 번밖에 못 찍는다고 아쉬워했더니, 남편이 그런다. "여러 개 찍어서 보내."
첫 두세 챕터는 원래 삐걱삐걱한다. 결정해야 할 용어는 많은데 눈에 쏙 들어오고 입에 착 붙는 말이 잘 안 보인다. 문장의 톤과 리듬을 잡기도 아직은 난감하다. 유튜브에서 들었던 저자들의 목소리와 말투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내 마음대로 이 문장 저 문장 읽혀 본다. (그런데 누가 어느 부분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계약서에는 내일 도장을 찍을 것이다. 이제 서문부터 소개, 첫 두 챕터가 끝났고 내일부터 세 번째 챕터에 들어간다. 컴퓨터를 켜기 전에 먼저 도장을 찍겠다. 사뿐사뿐 아니라 뚜벅뚜벅도 좋으니 덜 막히고 걸어가면 좋겠다.
전과 달리 재료도 모양도 다양해진 그 많은 도장 속에서 나는 내 구매 철학에 걸맞게 좋은 쪽으로도 안 좋은 쪽으로도 가장 눈에 안 띌 갈색 대추나무 도장을 골랐다. 오래 써야 하니 유행 타면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킨 거다.
오래오래, 한 백 번 찍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