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ron A Jul 02.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조나단 글레이저)

살인자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보다

          영화의 시작, 공들여 만든 듯한 기괴한 음악이 오픈 크레딧이 올라가는 회색 화면을 채운다. 공포 영화가 펼쳐질 듯한 화면이 지나간 후,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싱그러운 여름 숲속에 피서를 온 평화로운 어느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이 목가적인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 미묘하게 귀를 자극하는 소음이 깔려있다. 장면이 바뀌고 눈에 익은 군복을 입은 이 가족의 가장을 보면 관객들은 서서히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깜짝 생일 선물을 받고 기분 좋게 출근하는 아버지와 인사를 하는 엄마는 품에 안은 아기에게 여러 종류의 꽃을 보여주며 꽃향기를 맡게 한다. 이 한가로운 풍경은 그러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불안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가장이 입고 있는 군복, 굴뚝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간간이 등장해서 무표정하게 일만 하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독일어 등이 홀로코스트의 진한 그림자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이 영화가 갈 길이 섬뜩하게 유추된다. 귀를 자극하는 미묘한 소음은 끊임없이 이 영화의 배경을 채운다. 

 아우슈비츠의 감독관인 루돌프와 헤트비히 회서 부부는 아우슈비츠의 담장을 끼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헤트비히의 가사 노동은 여러 명의 도우미들이 분담하고 있고 이 도우미들의 정체도 심히 의심스럽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모든 것은 매우 풍족하고 이는 바로 옆 수용소에서 조달된다. 그 속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다양한 물품들도 보인다. 집의 여러 곳에 고정된 카메라는 이 가족의 다양한 생활 모습을 담는다. 기술자들과 소각로의 설계 도면을 검토하는 루돌프의 방과 다른 주부들과 함께 유대인에게서 포획한 물건에 대해 잡담하는 헤트비히의 부엌 등에서 배우들은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연기한다. 그리고 각 장면의 촬영이 동시에 진행됨으로써 평범한 일상이 돌아가는 부산스러운 가정의 모습을 더욱 부각한다. 이렇듯 생활의 모습을 촘촘히 연결한 촬영 방식은 사유가 없이 일상에 매몰된 사람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타인을 외면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포착한다. 이들을 둘러싼 아우슈비츠는 그들의 삶의 보급품이다. 그러나 이 보급품이 어떻게 눈 앞에 도착하는지는 헤트비히의 관심 밖이다.

 어둡고 좁은 집안에서 밖으로 나오면 아우슈비츠를 가린 담장 안에 잘 꾸며진 거대한 정원이 나온다. 여기에는 담장 너머 보이는 모습을 가리기 위해 심은 포도 덩굴과 다양한 채소가 심어진 텃밭이 있고 여러 종류의 꽃이 자라는 꽃밭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워할 풀장과 미끄럼틀도 보인다. 헤트비히는 어느 날 방문한 엄마에게 자신이 손수 가꾼 이곳을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이 거대한 정원의 담장과 주변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트래킹은 거리감을 통해 공간의 크기를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카메라는 담장을 넘어 아우슈비츠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이 풍요로운 정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나 갓난쟁이의 울음소리에 작지만 오싹한 소음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모든 장면에 이어진다. 어느 순간 평화로움은 서늘함을 내뿜는 공포로 변해가고 아기의 울음소리라 생각했던 소음은 부지불식간에 비명으로 바뀐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통과 절망의 소리는 일상의 가장 평화로워야 할 소음 뒤에 숨어 관객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체험하게 한다. 아기의 울음이 변한 비명은 지옥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고 관객들은 충분히 아우슈비츠를 그려낼 수 있다. 추악한 범죄의 현장을 담장으로 가리고 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우슈비츠의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와 회색 가루들이 끝없이 정원으로 날아온다. 그러나 헤트비히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왕국에서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이다. 

 비극적인 홀로코스트 속에서도 영화는 판타지를 차용해 이 극악한 현실의 이면을 발견한다. 회서의 집에서 일하는 폴란드인 가사도우미의 딸은 밤에 몰래 나와 과일을 숲과 길에 뿌려 놓는다. 루돌프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 속 과자가 현실에서는 과일로 대체된다. 군용 트럭이 지나다니고 회서가 아들과 함께 말을 타던 숲에서 이 과일은 한 번씩 모습을 보인다. 동명의 원작에도 없는 이 과일 장면은 열화상 카메라 촬영으로 현실이 아닌 판타지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이 과일은 그 마을의 폴란드인들이 그 당시에 실제로 뿌려 놓았던 것이다. 숭고한 인간의 실화가 영화에서는 판타지로 재연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즐겁게 춤추고 있는 파티장을 내려다보던 회스의 머릿속에는 가공할 만한 학살 방법이 떠오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처럼 루돌프 회스는 남은 전쟁 기간 동안 최악의 학살을 자행한다. 아우슈비츠의 감독관으로 다시 결정된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회서는 갑자기 속을 뒤집을 듯한 구토를 시작한다. 그가 내뱉는 구토는 과연 그의 현재였을까. 회서는 구토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의 아우슈비츠 추모관의 모습을 본다. 그들의 악행의 청사진은 영화의 말미에 이렇게 펼쳐진다.  

 아름답고 푸른 강이 흐르지만, 소각에 의한 오염 때문에 분진이 떨어지는 정원 안의 작은 물놀이장으로 아이들은 끌려 들어온다. 그러나 회서 부부를 비롯한 아우슈비츠의 독일인들은 그들의 합리화된 악행 속에서 미몽에 취해 있다. 수많은 유대인의 피와 뼈로 만들어진 그들의 안락한 삶은 인류를 짓밟는 환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을 위해서는 수많은 타인의 노력과 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동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그들에게 닥친 여러 가지 파탄을 해결하기 위해 황당하게도 유대인을 악마화한다. 비록 그 선두에 히틀러라는 악의 근원이 존재하긴 했지만 학살과 약탈로 쉽게 얻어진 물리적 환상에 독일인의 이성은 집단으로 마비된다. 홀로코스트는 그들이 자행한 실체적 진실이다. 그래도 그 주변에는 여전히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das Interessengebiet(나치독일이 사용한 아우슈비츠와 그 주변 구역을 일컫는 말, 영어로 the zone of interest)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파멸로 향하는 전범들의 미래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추악한 과거가 미래로 향할 때, 현재에 서 있는 우리는 인간성을 외면하고 부정과 불의와 타협하는 환상을 똑바로 직시해야만 한다. 영화는 한 나치 전범 가정의 일상 깊숙이 카메라를 밀어 넣고 관객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라는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될 인류의 비극을 끝없이 상상하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학살의 현장을 결코 화면 안으로 끌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 상상을 통해 우리의 이성을 각성하고 인간이라는 실체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현재의 삶 뒤에 숨겨진 이면의 소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방심하는 어느 순간 끔찍한 지옥이 우리의 이성을 가리고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켜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닉스>(2014, 크리스티안 페촐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