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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Dec 08. 2023

<피닉스>(2014, 크리스티안 페촐트)

부질없는 사랑의 기억을 버리다

   참혹한 지옥을 견디게 한 사랑의 기억이 이미 오래전에 배신으로 끝나버린 것이었다면, 그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행복했던 추억이 살아가는데 힘이 될 것이란 믿음은 오히려 그 기억의 주인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낼리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시작인 얼굴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다. 지옥의 시간을 버티게 해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이미 끝나버렸음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그를 찾아 베를린 거리를 헤맨다. 수용소에서 어렵게 낼리를 구한 레네는 죽어간 동포들을 확인하며 슬퍼하고 낼리의 남편 조니가 이미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낼리와 레네는 전쟁이 끝난 후 망가진 그들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법으로 노력한다. 래네는 베를린을 떠나 팔레스타인에서 새롭게 시작하려 하고 낼리는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찾으려 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낼리의 방법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수용소라는 지옥을 견뎌낸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비록 독일인일지라도 낼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레내는 결국 새롭게 시작된 삶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낼리에게 조니의 진실을 알린다. 아마도 레내는 배신을 겪고 고통스러워할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도 견딜 수 없었을지 모른다. 낼리에게는 사랑이 모든 것이었고 레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했다.

 영화는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국이라는 압박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도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독일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인 구역에 존재하는 ‘피닉스’라는 바는 아직은 독일이 패전에 대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미군을 상대하는 매음굴이자 환락이 넘치는 그곳에서 낼리는 조니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미 영화의 초반, 낼리와 조니의 만남이 낼리의 기대와 다를 것임을 암시한다. 낼리가 다른 사람을 남편으로 착각했을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에게 몹쓸 폭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수용소에서 핍박받은 유대인에게 독일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인 낼리와 레네에게 언제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냐는 독일인 가정부의 날카로운 질문은 전후 초반 독일인들이 나치가 저지른 패악을 아직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철저히 낼리를 배신하고도 그녀의 유산에 눈먼 조니는 유대인의 부를 공공재로 여기던 망상에 사로잡힌 나치의 모습 같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갈취할 수 있는 그녀의 돈이다. 그를 만나 진짜로서 가짜를 연기하던 낼리는 깨닫는다. 사랑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그녀를 참혹한 지옥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오직 돈만이 목적인 조니를 통해 낼리는 마음에 남은 행복했던 기억과 이제는 자신의 것이 아닌 독일에서의 삶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의지를 얻는다. 부질없는 사랑을 버리고 결국 그녀는 마지막 소망을 이루고 떠난다. 조니와 함께한 노래 ‘speak low’는 레네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낼리의 삶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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