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2019, 임대형)

함박 눈, 새로운 시작

by coron A

영화는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과 어느 날의 마사코와 새봄의 엉뚱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영화 속에서 또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알 수 없는 겨울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오타루의 끝없이 쌓인 눈의 거리를 걸어가는 마사코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덧없는 물음이 작은 의문을 남긴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당장에 멈추지 않을 눈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마사코는 언제 이 눈이 그칠까를 늘 세상을 향해 되물어 본다. ‘인생이란 무엇일까?’를 묻는 속이 빈 질문 같다.

윤희에게 10.jpg

윤희와 쥰의 어린 시절 어떤 인연은 화면에서 직접 보이지 않고 짐작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영화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이혼한 전 남편인 인호의 느닷없는 방문은 늘 계속되고, 새봄의 엄마에 대한 궁금증을 공허한 말로 채워주는 외삼촌의 대답처럼 그리고 늘 그늘이 쌓인 윤희의 얼굴이 그녀의 지난 세월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 일상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심중을 감추는 고독한 주인공처럼 함박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듯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윤희에게 07.jpg

오래도록 정리되지 못하고 쌓여온 부조리한 시간은 이혼을 하고 딸인 새봄을 키우며 노동에 지쳐가는 윤희의 굴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희의 이 굴레 안에서 새봄이 자라난다. 사랑을 하고 대학에 가고 꿈을 키우는 새봄의 인생이 쌓여간다. 그렇게 쌓이고 빚어진 새봄의 시작은 윤희의 보호를 조금씩 벗어나면서 성장해 간다. 어른이 되어가는 새봄에 의해 생겨날 새로운 여백을 윤희는 또 다른 시작으로 채워가야 한다. 그렇게 윤희가 만든 보호의 울타리 속 새봄은 윤희 자신이 겪은 아픔과는 다른 방향을 향한다. 성인이 되어 무언가를 벗어나는 인생은 누구나 비슷하다. 하지만 새봄의 애정 어린 호기심이 윤희로 하여금 마음 한켠에 치워두었던 아픔을 다시 직면하는 용기를 내게 한다. 이번에는 그 아픔이 윤희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지는 않는다. 모녀는 눈의 세상인 오타루를 찾는다. 오타루에는 윤희의 아픔이 살고 있다.

윤희에게 06.jpg

혈육의 죽음을 겪은 쥰과 마사코는 어쩌면 윤희와 새봄의 또 다른 버전처럼 보인다. 엄마의 과보호와 아버지의 무관심에서 탈출해 고모인 마사코와 함께 살며 견뎌냈을 쥰의 인생에도 아픈 추억이었을 윤희와의 인연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윤희와는 또 다른 쥰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마다 피어오르던 애틋함을 담아낸 편지가 쌓여간다. 그칠 리 없는 함박눈이 세상을 감싸던 어느 날에 그 편지는 마사코의 손에서 날아가 새봄이라는 기적에 다다랐다. 한 번씩 꿈속에서만 재회하던 그리운 사람이 덮여버린 과거 속에서 나타나던 순간, 삶은 또 다른 시작을 가능하게 할 기회를 꿈꾸게 한다.

윤희에게 11.jpg

눈은 다시 만난 윤희와 쥰의 인연을 보듬고 덮어 첫사랑의 아픔을 인생의 뒤안길로 보낸다. 그리고 삶에 지쳐있던 윤희의 일상에 다른 에너지를 채운다. 출퇴근길 옆을 항상 지나가던 기차의 뒷모습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그녀의 어느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심하게 일상을 유지해 가던 우리네 노동의 부조리함에서 왔다. 마음속 다른 한편으로 치워놓았던 삶을 짓누르던 과거의 한 대목을 잠깐 내려놔도 아니 내리는 눈에 덮어 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윤희는 용기를 낸다. 인호의 새출발을 축복하는 그녀의 진심 어린 눈물은 이 기적 같은 용감함에서 이어진다. 쌓이고 싸이면 모든 일상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리지만 그런데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하얀 무언가에 사람들은 세월을 실감하고 변화를 꿈꾸며 새로움을 시작한다.

윤희에게 01.jpg

이 영화는 윤희의 인생 절반을 어린 시절의 아픔과 함께 돌아보지만, 회한이 밀려와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삶의 단단함이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변한다. 보통 사람의 대부분의 일상은 부조리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일상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한다. 인생은 매일매일 힘을 내 용기를 만들어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여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용기를 만들어내는 힘은 일상에서 경직된 마음을 녹이면 그 속에 오롯이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는 이력서를 들고 다음 꿈을 향해 문을 여는 그런 용기가 마음속 어딘가에 묻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해탄적일천>(1983, 에드워드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