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자신의 필모의 괘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원작이 존재하긴 하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없이 착한 이 감독이 전쟁과도 같았던 그 혼란과 욕망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과연 어떤 영화가 만들어 질지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정말 많이 궁금했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 시대 그 투쟁의 한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던 사람들, 이건 지금까지 야마시타 감독이 해온 영화들 속의 사람들과도 어떤 면에서는 일맥 한다. 그래서 혼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의 내면은 감독 자신의 방식에서 그다지 많이 벗어나 있지는 않다고도 볼 수 있을 거 같다. 한 시절 절정의 광풍을 마감하는 일본의 전공투가 무너진 야스다 강당 사건의 그 중심에 서 있지 않았던 그들, 동경대 출신의 유명 신문사의 기자인 사와다와 또 그 투쟁에서 자신의 목표를 찾은 우메야마가 바로 그들이다.
다른 애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한 번 씩 감탄하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배우의 얼굴에 관한 것이다. 80년생인 츠마부키 사토시의 얼굴은 적어도 내가 이 영화를 보기 전 까지는 (비록 작년 이상일 감독의 <악인>을 보지 못했지만) 흔히들 애기하는 꽃미남 아이돌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혁명의 시대에 아듀를 고한 야스다 강당사건 이후 그 의미가 급속히 퇴색되고 바래진 전공투의 후일담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그 어리고 예쁜 얼굴은 분명 달라져 있다. 사와다는 삶을 고민하고 함께하지 못한 자책을 감추며 자신의 약점과도 같은 처지와 꿈 같은 이상을 저널리스트로서의 성공으로 넘어서려한다. 그 복잡한 내면의 결이 고민하고 번뇌하는 청년의 얼굴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 비해 마츠야마 켄이치에게서는 상대적으로 교활하고 교묘하게 자신의 추악한 속내를 감추고 청춘과 열정이라는 가면을 쓴 패악과도 같은 얼굴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얼마 전 개봉한 트란 안홍의 <노르웨이의 숲>과 비교해 보면 그 얼굴은 더욱 극명해진다. 츠마부키 사토시의 사와다와 마츠야마 켄이치의 우메야마 두 사람의 얼굴은 진실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역시 배우의 얼굴이란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비극의 순간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사와다의 죄책감이 우메야마의 거짓 열정과 신념에 동화되어 벌어지는 일이다. 결국 두 사람은 세상이 정리하기 시작한 일에 자신을 바치며 뛰어드는데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든 정의로운 저널리스트로서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와다는 결국 흐린 눈으로 우메야마를 바라보게 되고 실패한 전공투 이후 그 진정성과 도덕성마저 사라져가는 현실 앞에서 거짓된 그들의 투쟁을 지지했던 자신에 대한 실망, 당혹함 그리고 회한에 무릎을 꿇고 만다. 결국 실패로 귀결된 저널리스트로서의 사와다의 눈을 흐린 지점은 자신이 서있는 위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와다가 신문사 선배의 명령으로 투쟁의 현장에 전공투의 살아남은 지도자인 의장을 데리고 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차 안에서 그 의장에게 말한다. 자신이 의장의 동경대 후배이고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편한 곳에 앉아 있었다고. 수배와 도주에 지친 의장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오롯이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경찰에 붙잡힌 의장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스스로 몸싸움을 벌린다. 아마도 이건 보통의 정의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일들을 편안히 방에서 바라보는 심정과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보통의 사람들의 의식은 늘 마음 한 구석이 약간씩 괴롭다.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정의로운 사람들이 투쟁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든 보게 되지만 이놈의 생활인이라는 위치는 그 지점에 과감히 뛰어들지도 못하며 한 구석에서 슬퍼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용감하게 부정한 현실에 뛰어든 사와다는 결국 큰 좌절을 맞보지만 그래도 울지 않으려, 의연하려 한다. 잠깐 사귀던 소녀 앞에서도 그는 늘 어른 같은 얼굴로 말한다. 소녀는 진정 남자가 울 수 있다는 것은 진실한 것이라 피력하지만 그는 그 상황에서도 스스로 의연하다. 아닌 의연한 척을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영화 평론가로 살아가며 아직도 자신에 대한 환멸을 털어버릴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가장 진실하다고 믿었던 그 시기에 거짓을 위장하고 만났던 친구 앞에서, 아주 단순히 살아있는다는 것에 대해 오롯이 감사하는 그 형님 같은 친구 앞에서 결국 오열하고 만다. 그런 것이 어쩌면 현실의 벽을 넘어 설 수 없었던 설익은 청춘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아닐까.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영화에서 높이 사고 싶은 점인데 과거의 그 세대가 아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삼십대 후반인 감독이 이념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온갖 욕망들이 인간을 지배하던 그 때의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이 세월을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그리고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 상실감과 더불어 그 옛날 신념으로 투쟁하던 그들을 바라보며 또한 함께하지도 넘어서지도 못했던 그 마음조차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그들의 현실이나 지금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나 청춘이란 이름으로 넘어설 수 없는 것에 부딪히는 어찌 보면 무모한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닫지도 않을 그 신념 앞에 동지들과 스스로의 가치마저도 배반하는 우메야마 조차도 감독의 시선은 차갑게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 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과연 사와다가 울 수 있었던 그 지점이 세월이 한참 지난 후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그가 결코 진실하게 대하지 못했던 친구 앞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사와다의 오열 뒤에 흐르는 '밥 딜런'의 [My Back page]. 그 시절의 청춘은 정말 그러했을까? 사람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혁명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작금의 시대에 혁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 시대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이 영화는 실제 헌병 살해사건이 모티브가 되기도 했고 당시 아사히신문사의 기자였던 ‘사와다’의 실제 모델인 카와모토 사부로는 그 당시 사건에 연루된 이후 역시 영화에서처럼 신문사를 그만두고 문화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의 자전적 스토리는 르포 형식으로 발간이 됐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사 하면 지금 우리의 조선일보 정도와 비교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보수의 최고봉에 서 있던 아사히신문도 그 내부의 저널이 전공투를 옹호 했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우리의 신문은 우리의 학생운동 과정과 군사정권에서 어떠했을까? 비록 우리의 역사에 엄청난 트라우마인 6.25가 버티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그 정치의 논리에 우리의 의식을 더 현명하고 정의롭게 세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이제는 의식의 깨어남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꼭 현재의 나꼼수 같은 트리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살 이 세상을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사람들에게 정말 권하고 싶다. 왜냐면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감독이 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사람을 고민하는 진정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