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년 살이의 기록들 7
(*주의: 이 글은 극히 제한된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걸 미리 밝혀요 :)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만 3년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지낸 적이 있다.
당시 남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 중이었고,
서울에서 매거진 에디터 생활을 하던 나는 남편과 결혼 후 함께 미국으로 가서 석사 과정을 다녔다.
3년 동안 이 고생 저 고생 하며 꽤나 미국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10여 년 후 아이와 1년 살이 할 곳을 결정할 때 제일 먼저 미국을 후보 리스트에서 지웠다.
가장 큰 이유는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겠지만) 총기 문제다.
요즘 필라델피아는 펜타닐의 도시로 새삼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당시에도 치안이 정말 좋지 않았다.
특히 총기 문제가 정말로 심각했다.
매일 아침 뉴스 첫 꼭지는 당연한 듯 이 도시 어디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였다.
학교는 필라델피아 빈민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결혼 전 기숙사에서 지내던 남편은 가끔씩 창 밖에서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ㄷㄷㄷ
물론 필라델피아가 미국에서 치안이 가장 나쁜 도시 중 하나에 속하기는 하지만,
총기 사건은 백인 거주 비율이 높은 중산층 도시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 아이들 학교에서도…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인종차별적 욕을 들은 적도 종종 있고,
심지어 한 흑인 소녀가 내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시늉을 하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되돌아 가는 황망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미국의 생활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기분이다.
도저히 이런 불안을 안고 미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낼 자신이 없었다.
또 다른 포인트는 미국의 자동차 중심 문화다.
미국은 맨하튼이나 시카고, LA 등 손에 꼽는 대도시 아니면 대부분 자동차 중심으로 동선이 짜여진다.
즉 걸어서 마트에 가거나 산책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이 많다.
식구 수 대로 차가 있으면 그나마 나은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부부 중 한 사람이 밖에 나갈 경우
한 사람은 집에 갇혀있어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계속 차를 타고 다니면서 급속도로 늘어날 뱃살과 운동 부족으로 굳어진 몸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 다른 영어권 국가를 두고 고민을 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영국으로 최종 결정을 내린 이유는
여행 때문이었다.
사실 1년 동안 영어권 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영어 실력이 드라마틱하게 늘지 않는다.
(내가 그 산 증인 ㅋㅋㅋㅋ)
원어민이 아니라면 영어는 평생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하는 산 같은 존재랄까...
영국에 온 후 자유 시간이 많아진 나, 지금도 영어 공부에 열심히 매진하고 있다.
영어보다는 1년 동안 아이와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결국 남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개성 강한 유럽 국가들의
서로 다른 유적, 언어, 음식, 국민성 등을 최대한 많이 경험해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것도 시차로 고통받는 일 없이!! 사실 요게 핵심 포인트다.
영국에 온 이후 런던, 본머스, 와이트 섬 등 이곳 저곳을 여행 중이고,
4월 부활절 방학 때는 이탈리아 피렌체부터 남부 아말피까지 렌트카 여행을 했다.
콜로세움과 성 베드로 성당 등 교과서와 뉴스에 나오는 유적지와 그림을 보고
이탈리아 피자를 맛보며 12살 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5월 말 연휴에는 5일 동안 파리에서 머물 예정이다.
그리고 이건 영국에 오기 전까지는 크게 체감하지 못했던 장점인데,
영국 사람들은 대체로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하다.
물론 이 곳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친절한 사람과 불친절한 사람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강력 사건도 벌어지고 거리에 노숙자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영국인들이 평균적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매너가 좋고,
약자를 보호하고 도움을 주려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 싶다.
아이가 영국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먼저 문을 잡고 나를 기다렸다가 'After you.' 라고 말해서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이제 두 달 좀 넘었지만 영국에서의 1년 살이는 꽤나 만족스럽다.
게다가 봄이 되면서 해가 쨍쨍한 날이 더 많아지는 것이 내가 있는 곳이 영국이 맞나... 싶다.
이곳 사람들도 올해 사우스햄튼 봄날씨가 유독 좋다고 입을 모으는데, 날씨 요정이 도와준 덕분인가...
이 글을 쓰는 순간 거실 창 밖의 연녹색 나무 사이로 비추는 오렌지빛 초저녁 햇살이 더없이 안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