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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하 Dec 30. 2022

아버지 우리들의 아버지

크나큰 나무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매년 겨울이면 전화해서 ‘밥을 사 주마’라고 했다. 6남매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일일이 전화해서 생일을 축하해 주며 미역국은 챙겨 먹었는지 물어봤다. 매년 아버지의 전화는 우리 남매의 생일이 돌아옴을 알려주는 알람이었다. 오빠의 생일, 동생 생일이 언제라며 전화해서 꼭 챙겨주라며 서로라도 챙겨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딸이 전화를 안 하니까 아빠가 해야지. 내일 뭐 하니? 아빠가 밥 사줄게”

“벌써 제 생일이에요? 이번에도 생일도 못 챙길 뻔했는데 아빠가 알려줘서 챙길 수 있게 됐어요. 아빠 덕에 생일인지 알았어요.”     


  코로나 때문에 못 간 지 오래되어 아버지는 많이 서운해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오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가 사는 곳에 확진자가 갑자기 늘어나서 더더욱 오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전화로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은 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다.     


  약속한 날에 아버지를 데리러 집으로 갔다.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리러 갔다. 차와 과일을 준비해서 안방으로 들어간 나에게 아버지는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흰 봉투 하나를 건네셨다. 언제나처럼.     


“아빠 왜 이러세요. 제가 오히려 아빠한테 용돈을 드려야죠”

“그냥 받아라. 이제 얼마나 줄 날이 있겠냐?”     


 아빠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손짓 하나에 조용히 봉투를 집어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생일이 되면 용돈 십만 원을 줬다. 챙겨주고 싶어 했다. ‘어렸을 적에도 유달리 예뻐했다는 둘째 딸 생일은 더 챙겨주고 싶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두말하지 않고 시골에 내려왔다. 아버지는 2년 동안 멍한 상태로 지내셨다. 막내 여동생은 고3 수험생이었다. 그때 내 나이 26세. 아버지는 아마도 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십만 원은 단순한 십만 원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였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서 막내딸을 대학교에 보냈다. 자식을 결혼시키면서 20년을 넘게 혼자 생활했다. 많은 일을 겪었을 테다. 젊었을 때 마을에서 청년회장을 하고 이장을 맡아오면서 동네를 책임졌던 젊은 청년 이장은 지금 생각해도 멋진 모습이었다. 동네에 젊고 유능한 이장이 생겼다며 경사가 났다. 단단하고 든든한 집안의 맏아들로 젊은 시절을 살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80대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크고 단단했던 아버지의 몸은 허약해지고 힘이 없어 마른 몸이 되었다. 작년 여름에는 너무 덥다며 머리를 밀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이 찡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항상 반듯하게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쟈켓을 입었다. 바지에 빳빳하게 주름을 잡고 다녀서 동네에서 멋쟁이라고 할 정도로 단정한 차림이었다. 혼자 지내면서도 깔끔하고 정갈하게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의 모습이 안쓰럽고 걱정이 되었는지 아버지는 한 올도 남지 않아 까끌거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더워서 싹 밀어버렸다. 시원하고 좋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고 머리를...”

“금방 자랄 건데 뭐가 걱정이야, 아빠 걱정은 하지 마”     


  더 이상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이야기를 더 나누게 되면 펑펑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그런 일이 있고 1년이 지난 지금은 치아가 빠져 식사를 못 먹었다. 식사를 잘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식사는 잘 챙겨서 드시고 있어요?”

“씹을 수가 없어서 라면 끓여서 후루룩 먹고 만다. 걱정하지 마”

“라면을 드시면 혈압이랑 당이 올라갈 텐데 그럼 큰일 나요”

“괜찮아, 잠깐 그럴 건데 뭐 큰일이라고”     


  지난 추석에 갔을 때 치아를 하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극구 싫다며 반대했다. 이가 없으면 음식을 어떻게 드시겠다는 건지. 아버지한테 지고 말았다.      


“이 나이에 내가 이는 새로 해서 뭐 하게, 그냥저냥 지낼 만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먹는 즐거움이 있고 이가 없어서 씹지를 못하면 기억력도 나빠질 텐데요”

“내가 좋아질 머리가 어디 있냐. 다 살았는데 글쎄 됐다니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뻔한 거짓말을 했다. 억지로 끌고 가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몇 번 더 설득을 시도하다 돌아왔다. 요즘은 아예 씹을 수가 없으니 라면을 끓여 불려서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한테 달려가 보니 앞에 라면 끓인 냄비가 놓여 있었고 식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식사하세요? 어떻게 해!”

“걱정 말어. 괜찮어. 생각보다 맛있다.”     


  이것저것 장을 봐서 들고 갔던 장바구니에서 가져간 음식을 꺼내 놓았고 싸간 음식을 냉장고에 정리했다. 아버지는 “뭘 이렇게 사 왔어.”라고 말로는 하시면서도 뭐가 들었는지 쳐다보며 궁금해했다.   

  

"이거는 식사 잘 못 할 때 드세요. 이거는 이 아프니까 데워서 드시면 되는 죽이고, 이거는 입맛 없을 때 드시라고 간식 같은 거 사 왔어요. 굶지 마시고 뭐라도 챙겨서 드세요. 냉장고에 정리하고 나머지는 잘 보이는 곳에 놓을 게요."     

"고맙다. 괜히 신경 쓰게 했네. 일 끝나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피곤할 텐데 이렇게 많이 사 왔어. 한참 먹어도 안 없어지겠다."

"다 드시면 얘기하세요. 또 사 올게요."     


  아버지를 자세히 쳐다보니 어깨는 언제부턴가 구부러지고 있었고 얼굴 살은 점점 빠져서 주름이 깊어졌다. 항상 자식들 생일이 돌아오면 한 명 한 명 생일을 기억해서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그날이 돌아오면 전화를 걸어 축하의 말과 함께 꼭 ‘생일 미역국은 먹었는지 생일 아침은 먹었는지’ 확인을 하셨던 분이었다. 자식이 생일날 미역국 한 그릇도 못 챙겨 먹을 까봐 서였다. 생일 때가 되면 먼저 전화해서 "밥 먹자"라며 엄마 대신이라고 한 끼라도 챙겨주려고 하셨고, 용돈이라며 하얀 봉투에 십만 원을 넣어서 주었던 아버지가 얼마 전부터는 자식들 생일에 전화를 안 하셨다. 점점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우리 6남매의 아버지는 이제 자식들 생일을 한 명한 명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일까. 기억 속에 자식 6남매의 생일이 지워진 것일까. 아버지의 기억은 먼 옛날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이 많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우리들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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