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차를 하며 무슨 말을 기다렸을까?

츤데레 아빠

by 정아

기차를 타고 오고 가던 남편은 이번에 차를 직접 운전해서 왔다. 평소에 3시간 반 정도 되는 장거리를 운전해서 오가는 것이 피곤하다며 기차가 편하다고 매진된 날에도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수없이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더랬다. 그런 남편이 직접 운전을 해서 왔다.


지난 금요일에 딸아이가 집에 왔다. 독립 후 처음으로 온 것이다. 그렇다고 되게 오래 지난 것도 아니다. 토요일에 이사하고 일주일 만이었다. 가져갈 책이 있어서 온다는 것이었다. 책도 가져가고 이것저것 챙겨가겠다며 금요일에 왔다가 주말에 간다고 했다. 가져갈 물건이 많으면 택배로 보내던가 데려다주면 그렇게 하겠다며 집에 오겠다던 딸. 이 말을 하루 전날인 목요일에 남편에게 전했다. 남편은 아마도 기차표를 취소했으리라.


토요일 아침 일찍 남편이 사라졌다. 역시나 남편은 세차를 하고 왔다. 토요일에 딸아이의 짐을 챙겼는데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고, 기차표를 예매하지 못해서 일요일 오전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준비하려고 했으나 아침밥을 준비해서 먹이고 어쩌고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11시가 다 되어갔다. 갑자기 남편이 서두르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챙겨두었던 짐을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차 문이 열렸다. 남편이 같이 가자고 자기 차에 짐을 실었다. 나는 장거리 운전하지 않아서 좋았고, 아빠랑 같이 가니 딸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즉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어차피 그럴 거면서...'


아빠는 딸바보다. 어쩔 수 없이 딸바보.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서운함을 표현했던 것이다.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정리를 하면서 분리수거를 도와주는 남편. 화장실을 보더니 새로 사놓았던 변기커버를 갈지 못한 것을 보고 새것으로 갈아주고 있다. 세면대 물이 잘 내려가지 않으니 또 이 잘 내려가도록 배수관을 뚫어주고 있다. 짐정리가 아직 덜 되어 있으니 이것저것 정리를 도와주었다. 집으로 가려고 나오는 손에는 아까 분리수거했던 쓰레기를 들고 있었다.

역시 츤데레...


딸아이를 독립시키면서 남편에게는 집을 구할 때까지 비밀로 했다. 가계약을 마치고 드디어 집을 계약하기 전에 고백하며 같이 가자고 하니 남편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부동산에 입주가 빠르다면 빨리 할 수 있을 거라며 일정이 앞당겨져도 괜찮다고 말했었다. 덕분에 생각했던 날보다 2주 정도 이사하는 날이 당겨졌다.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한 당이리에 바로 이사를 하게 된 이유였다.

사실 이번 딸아이의 독립은 남편에게는 사전에 미리 상의하지 못했다. '못했다'는 말이 적당한 말이다. 남편에게 이사할 집을 알아보고 정해질 때까지 말을 아껴야 했다. 아빠가 반대하면 딸아이는 독립하겠다는 말뿐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말을 안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딸에게도 아빠에게는 조금 늦게 얘기하겠다고 말하고 당분간은 아빠가 없는 평일에 움직이기로 했다. 금요일만 되면 꼬박꼬박 집으로 오는 남편에게 들킬까 봐.


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보겠다는 아이에게 남편은 '그런 걸 왜 하려고 하냐'며 반대했다. 아빠의 한마디에 자신의 의지가 꺾인 아이는 하루 종일 이불속에서 펑펑 울더니 자신의 의지를 굽히고 말았다. 그 뒤 아이는 자신감이 떨어져서 학교에 가는 것도 흥미를 잃었는지 시큰둥했다. 매사에 자신이 없어했다. 그런 일을 겪어서인지 아빠의 한마디가 아이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아빠의 말에 흔들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얘기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이번 일은 '남편이 알았을 때 느끼는 실망감'이 클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만 몰랐으면 했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독립을 위한 일들이 진행되었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위해 주말이 아닌 평일에 서울로 경기도로 다녔다. 집을 알아보는 것과 동시에 이사하는 집에 들어갈 물건들을 선정했고, 인터넷으로 알아봤다. 이사와 관련한 대화는 주말이면 카톡으로만 해야 했다.


이사할 집을 계약하기 일주일 전, 그러니 이사하기 일주일 전이 되겠다. 그날 주말에 집에 온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딸아이가 독립해서 이사할 것이라고 집은 이미 구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오히려 남편을 염려하는 척했던 것 같다.) 말했다. 남편의 반응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사할 날이 다가오는 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나의 관점에서 삐진 것이고 남편의 관점에서는 단단히 서운하고 화가 난 것이다.) 그렇게 남편의 어떠한 도움 없이 이삿날이 다가왔고 나와 딸은 짐을 차에 싣고 이사를 했다. 남편은 같이 가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 책꽂이 등을 옮길 때에도 말없이 주차장으로 짐을 옮겨주는 게 다였다.


그런 남편이 드디어 일주일 만에 딸아이의 원룸에 같이 갔다. 토요일 오전에 세차를 하면서 남편은 속으로 이미 일요일에 같이 가기로 결정했던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물을 뿌리고 비누칠을 하고 물기를 닦아냈을까. 세차를 하는 내내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와 딸아이가 어떤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을까?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싶다.


"아빠, 같이 가요!"



정안 휴게소를 지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습기를 머금은 하늘



#독립 #아빠 #이사 #원룸 #내가 쓰는 너의 독립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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