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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Beluga 고래아가씨 May 06. 2021

<미나리>를 보고 사무치게 그리워진 것들

‘아시안 혐오 범죄’ 없는 한국땅이 가장 그립습니다


The Weirdest Era in the U.S.


어느덧 미국 생활 5년째,

남편이 소회가 어떤지 묻습니다.

집에 오랫동안 갇혀있다 보니 첫 대답은 “심심하다(Boring in general)” 였는데, 바로 덧붙였습니다.

“사실 아직 제대로 대답하기 힘들어. 오자마자 미국 역사상 최악의 시기를 보냈잖아. 가장 이상한 대통령이 집권했고, 팬데믹이 덮친 데다 동양인을 노린 증오 범죄가 판치는 시대를 겪고 있으니까.”

미국서 태어나 평생을 보낸 남편도 동의합니다.


최근 며칠간 뉴욕 맨해튼에서 대만 여성이 망치에 강타당하고, 볼티모어에선 한인 자매가 벽돌에 맞아 다치고, 저의 생활권역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던 30대 아시안 남성이 무차별 폭행을 당했습니다. 앞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은 지난달 말, 아시안 혐오 범죄 대응방법과 셀프 디펜스 세미나 개최 소식을 커뮤니티에 공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불시에 벌어지니 대응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국사람을 비롯한 아시안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발판으로 지난 50년간 미국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뤘지만, 여전히 권력의 대부분을 쥔 백인들로부터 정책적인 소외 (이를테면 동양인들의 대학 정원 제한 등의 차별)에 은근한 멸시까지 받고, 신체적 조건이 월등한 흑인들에게 물리적으로 치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흉흉한 소식까지 더해지자 교민들은 불안함을 넘어 미국 땅에서 당하고 사는 게 진절머리 날 정도라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하기도 합니다. 다수의 한인들은 총기 소지에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데도 이제는 하나 갖춰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불안하고 남편과 상의해 본 적도 있지만, 총기 소유보다는 집에서 나가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1년이 넘는 팬데믹 기간 중 각종 생필품과 식료품 배송 체계가 잘 갖춰진 덕을 이렇게 보게 되니 편리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그래도 미국에 나쁜 일만 가득했던 건 아닙니다.

이례적으로 2년 연속 한국 영화가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켰죠. 덕분에 지난해에는 영화 <기생충>, 올해는 <미나리>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휘어잡는 장면을 캘리포니아 현지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중계방송을 보면서 이곳 교민들과  보이스 채팅을 하며 함께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더불어 흰머리가 숭숭 나는 나이에 어렵게 임신에 성공해서 이제는 태동을 즐기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민 1세대, <미나리>가 달리 보입니다


<미나리>를 본 건 임신 4개월에 입덧 때문에 두 달새 7kg이나 빠졌던 지난 3월, 숨도 몰아쉬어야 할 만큼 힘들었던 나날 속에 잠깐 정신이 맑아졌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인 사회에서 입소문이 나 보고 싶었는데 팬데믹 때문에 온라인 상영을 하게 된 안타까운 상황이 영화관에 갈 만큼의 체력조차 없었던 제겐 오히려 행운이었습니다. 영화는 잔잔했지만, 울림은 컸습니다.  


안정된 직장과 경력을 내려놓고 미국에서 새로 시작한 저의 막막함은 남편 ‘제이콥’에게 겹쳐졌습니다.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쉬운 ‘미국 아이’들을 둔 한국 엄마 ‘모니카’와 할머니 같지 않은 한국 할머니 ‘순자’가 겪는 문화적 갈등이 미국에서 출산과 육아를 앞둔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과 다르지 않겠구나 싶습니다.

딸 ‘앤’은 어린데도 동생을 살뜰하게 보살피며 엄마를 돕습니다. 뱃속에서 발길질을 하고 있는 제 딸 역시 나중에, 미국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사회적으로는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는 엄마 때문에 늘 나이보다 조숙하고 뭐든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눌려 살게 될지 모릅니다. 영화 배경인 80년대 초 동양인이 드문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주인공 ‘데이빗’은 공교롭게도 제 남편과 이름과 나이까지 같습니다.


씨앗을 뿌린 후 첫 세대는 수확이 어렵지만, 2세대부터는 거둬들일 수 있는 미나리처럼 1세대 이민자들은 자녀들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국땅에 뿌리내리고자 애씁니다. 영화 속 부부의 모습에서 시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했죠. 계속 한국서 살았다면,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등장인물에게 이렇게 대입되지 않았을 터, 분명 전혀 다른 감상을 내놨을 겁니다.


무엇보다 미나리가 먹고 싶습니다


영화 끝자락에 미국 땅에서도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를 보면서 주인공 아빠와 아들이 흐뭇해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만도 했건만, 제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미나리가 먹고 싶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욕망뿐이었습니다. 몇 달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깨끗이 씻은 아삭한 미나리를 쌈장에 푸욱 찍어 꼭꼭 씹어먹으면 특유의 흙내음이 입덧을 싹 씻어내 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시안을 먹잇감 대하듯 하는 흉흉한 시절에 한밤 중 고속도로를 30분 달려 한국 마트에 달려가기는 부담스럽고, 간다 해도 미나리를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먹고 싶은 게 떠오르면 집 앞 마트나 시장, 편의점에 남편을 보내거나 직접 나갈 수 있는 한국이 아닌 게 그리 애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30분 차 타고 가면 청도 한재 미나리꽝에 닿았는데... 밭에서 바로 뽑은 미나리에 삼겹살을 지져 싸 먹을 수 있었는데... 손에 넣을 수 없는 미나리 한 단은 이곳의 불안한 치안과 소수인종으로서 믿을 수 없는 공권력, 팬데믹이라는 시대 상황, 지리적 여건 등등 모든 것을 다 불만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아쉬웠던 또 한 가지는 바로 차가운 맥주였습니다. 배경인 아칸소의 무더위에 배우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에 절로 맥주 생각이 났습니다. 옆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남편은 이미 한 캔 시원하게 들이켜 불콰해져 있었죠. 임신해서 못 먹는다고 남편까지 못 먹게 할 수 없는 노릇, 참 약이 오르더군요.   


그런데 얼마 뒤 호기심이 치솟는 장면을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기자회견 중에 보게 됐습니다. 바로 간식 코너에 마련된 미나리 맥주!

한인 청년이 대표인 브루어리 스타트업 <도깨비어>의 ‘미나리’맥주. 영화<미나리>의 포스터에서 영감을 얻은 패키징이 인상적이다. 수익금은 한인커뮤니티에 전액 기부 예정이라고 한다.

미나리와 맥주가 영화 보는 내내, 아니 몇 주 동안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인데, 미나리와 맥주를 하나로 합쳤다니요! 먹어보지 못해 맛이나 풍미가 상상조차 안돼 더 궁금했습니다. 제품 설명에는 미나리 씨앗과 레몬, 라임 껍질 추출물을 넣어 미나리 특유의 쌉쌀한 맛과 흙내음을 시트러스 향과 잘 배합시켰다고 합니다. 마침 지역 인터넷 커뮤니티에 맛있게 잘 마셨다는 시음 후기도 올라왔는데 임신부는 입맛만 다실 수밖에요.


누가 이렇게 멋진 제품을 만들어 적절한 타이밍에 내놨나 보니 한인 청년 이영원 씨가 주인공입니다. 회사 이름은 <도깨비어>. 한국적인 캐릭터 도깨비를 테마로 회사 로고를 아예 한글로 도장 파듯이 빨갛게 새긴 것부터가 화끈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류인 맥주에 김치, 생강 같은 한국적인 재료를 첨가하는 과감성, 그리고 무엇보다 백인 위주로 돌아가는 미국 맥주 시장에서 설립 첫해 콘테스트에 출전하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면이 대표의 혁신적이고 열린 성향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이 대표는 영화 <미나리>를 보고, 미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한 미국의 모든 이민자에게 무언가 헌정하고 싶었다며 <도깨비어 미나리> 맥주 수익금 전액을 한인 커뮤니티 기부한다고 합니다. 사업성에 인성까지 받쳐주는 이 시대의 젊은이입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서 멋진 한인 청년이 만든 맥주이니 응원도 할 겸 출산하면 반드시 마셔보리라 다짐했건만, 부질없네요. 이 맥주는 한정판으로 소량 생산돼 곧 매진될 거라고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계신다면 미나리 맥주 주문해서 드셔 보시고 댓글로 소감 좀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대리 만족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크흑....  


건강하게 출산하고 아이가 좀 자라나면 팬데믹도 주춤해질까요? 그럼 안전한 한국에 가서 한강 둔치에 유모차 대놓고 튀긴 닭 한 마리 시켜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선 길에서 맥주 마시다간 경찰에 끌려가거나, 그전에 누군가에게 망치로 얻어맞고 강도당할 테니까요. 어쩌면 앞으로 영화 <미나리>가 ‘우리들(한국 사람을 포함한 아시안)은 그저 하루 하루 좀 더 나아질까 막막해 하며 이국땅에서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이민자들일 뿐이다.’라는 인식을 조금이라도 널리 퍼트려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자기들 밥그릇 뺏으러 온 똑똑한’ 아시안에 대한 일부 미국인들의 편견도 좀 불식시키고 상대적으로 왜소한 우리를 좀 덜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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