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07:00 생존 기계는 아니므로

by 김기원

집사람이 되고 나서 가끔, 내가 생존을 위한 기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마치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으로 설계된 기계가 된 느낌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일지를 쓰는 밤이 되면, 어제나 그제나 그 이전의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 일과가 마치 공산품 같다. 이제 더 이상 유기체가 아닌 것인가? 그런데, 기계도 오작동을 하듯이, 예상치도 않는 일들이 기계 같은 일상에 벌어진다. 인간적 실수라 불리는 일들이 인간임을 증명하듯 오류처럼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생존 기계가 아님을 증명한다.

고양이는 가르치지 않아도 대소변을 잘 가린다. 먼 옛날 거친 야생에서 살던 시절부터 자신의 흔적을 감춰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렇지만 반드시는 아니다. 어디든 예외는 있다. 어제의 흔적을 지우러 다니다 보면 강하게 밀려드는 냄새가 있다.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암모니아 냄새. 누굴까? 누가 친환경적이고 은밀한 화장실을 두고 노상방뇨를 시전한 것일까? 범인을 특정하지 못하고 온갖 추측만 난무하던 어느 날, 드디어 현장을 목격했다. 그래 범인은 바로 너!

추리 영화의 묘미는 반전이다. 우락부락한 외모와 저승사자 문신을 한 인물이 모기 날갯짓 같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십자수를 놓는다. 조막만한 머리에 부드러운 얼굴선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물이 숨겨둔 탄탄한 몸매와 총칼들을 얼핏 보여준다. 누가 범인일까?

추측의 묘미도 반전에 있다. 기골이 장대해서 우리 집 네 발 생명체 세계인 사족계 왕이 될 상을 가진 고양이. 고등어와 같은 털 색을 가졌지만 색깔만 고등어일 뿐 무늬는 누가 봐도 호랑이다. 배를 깔고 누워있는 모습을 항공 촬영 시점으로 본다면 영락없는 호피무늬 깔개다. 살집이 넉넉하고 풍성해서 귀하게 자란 티가 팍팍 난다. 어찌나 유복하게 자랐는지 지금은 거만해지기까지 했다. 앉을 때도 대개의 고양이처럼 앞 발을 공손하게 모으지 않는다. 넉넉한 살집 덕에 못하는 것이지만, 항상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다. 너의 이름은 초코.

옷보고 사람 봤다고 하지 말라는데, 외모보고 고양이 봤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외모로는 호랑이와 싸워도 지지 않을 위풍당당한 대장부 미남 고양이지만, 내심은 한없이 소심하고 겁도 많다. 주로 머무는 곳은 거실에 놓인 탁자와 의자 사이. 은폐 엄폐물이 많아 숨기 좋고 적이 들어오기 어려운 자리다. 손님들이라도 올라치면 맨 먼저 후다닥 도망간다. 집을 지키겠다는 생각 따윈 일절 없다. 손님이 익숙해진 다른 고양이들이 집안을 활보할 때도 끝끝내 나오지 않는다. 오늘 초코의 모습을 봤다면 오늘치 행운을 다 쓴 것이다. 심지어는 평생을 함께 지낸 집사람에게도 심각하게 내외 중이다. 간식을 줄 때마저도 항상 한 발자국 뒤에 있다. 초코의 최고 반전은 목소리다. 아주 얇고 가녀린 울음을 내뱉는다. 초종국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은 목소리 때문이다. 기골은 장대한데 목소리는 가냘픈 가수를 떠올리는 울음이다.

초종국의 범행 현장은 광범위했다. 소파 위, 방문 앞, 침대 위, 싱크대 앞, 베란다, 사람 화장실 안, 옷장 앞, 신발장 앞, 현관문 앞. 발 닿는 곳 어디든, 도대체 일관된 범행 장소가 없었다. 고양이 중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화장실이 아닌 곳에 실수를 한다고 하던데, 소심한 초종국은 스트레스가 그렇게나 많았던 것인가? 돌아보니, 덩치 작은 개체와의 싸움에서 번번이 져서 도망치며 울었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는 장난을 가장한 인간의 괴롭힘이 있었다. 잘생기고 풍채 좋은 것이 죄는 아니건만 원치 않는 아는 척 때문에 몸도 마음도 고요할 시간이 없었던 초종국. 분명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저 한없이 안쓰럽기만 한 초종국.

소파를 버리고, 이불을 빨고, 커다란 소변 깔개를 여기저기 깔았다. 물청소가 가능한 곳은 바로바로 씻어냈다. 고양이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방향제도 설치했다. 초종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할 수 있는 것이래야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 초종국의 스트레스를 깨끗이 잊게 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아차차! 우선 초종국이라고 놀리는 일부터 하지 말아야겠다.

예상치 않았던 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길지 알 수 없다. 어떤 일은 기쁘고, 어떤 일은 슬플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상자에 든 초콜릿 같아서 알 수 없다. 기쁨에 넘치지 말고, 슬픔에 잠기지 않으며, 다만 인간적인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을 고요히 할 뿐이다. 초코가 일으킨 일들 때문에 오늘도 생존기계가 아닌 아주 인간적인 하루가 되었다.

흠흠. 이건 무슨 냄새지? 그래! 범인은 바로.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초코는 똥만은 고양이 화장실에서 처리한다. 근래에는 소변도 깔개 위나 물청소가 가능한 곳에서만 싼다. 집사람 입장에서는 소변을 치우는 것이 수월해졌다. 그보다도 초코가 스트레스를 좀 덜 쌓고 사는 것 같아 안도하게 된다. 심지어는 가끔 배를 내놓고 잔다. 고양이가 배를 내보이는 것은 안전함을 느낀다는 뜻이란다. 그래도 여전히 목소리는 가냘프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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