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0 오래된 문장 하나를 찾으러 글숲을 거닐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고,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글숲을 떠돌았다.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문장 하나. 표식을 남긴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표식을 따라간다.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따로 마련한 공책에 옮겨 적는다. 눈으로 한 번 보고 손으로 또 한 번 읽는다. 눈으로 볼 때는 지나쳤던 쉼표가 숨을 쉬고, 조용했던 따옴표들이 새살거린다. 가끔은 이정표를 잃은 나그네처럼 표식의 이유를 찾지 못해 당황스럽다.
손으로 읽기가 끝나면 컴퓨터로 옮긴다. 수집된 문장들 아래에 전체적인 느낌을 간단하게 남긴다. 독후감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조촐한 기록문이다. 글을 잘 읽었다면 기록문은 읽은 글의 모습을 닮는다. 설명하는 글을 따라 설명조가 되기도 하고, 몽골몽골한 글을 따라 감성 폭발하는 한밤의 연서가 되기도 한다. 글을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특별히 좋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모르는 사이에 스며든다.
문장 수집의 역사는 길다. 한 세대를 넘길 정도니 충분히 길다고 할 수 있다. 길다는 것이 반드시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다는 것은 뿌듯한 마음을 갖기에 충분하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껌종이 같이 하찮은 것이라도 뭐든 모으는 것을 좋아했던 오래전 습관에 비추어 본다면, 문장도 그저 수집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밑줄만 그었다. 밑줄은 책장을 덮으면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밑줄을 찾아 읽은 글을 또 읽고 싶지는 않았다. 밑줄 대신 종이를 준비했다. 책갈피처럼 끼워놓고 수집할 문장을 적었다. 종이를 모았다. 그러다 별도로 마련한 공책에 옮겨 적었다. 본격적인 문장 수집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글 속의 문장만 수집했지만 점차 범위가 넓어졌다. 신문이든, 잡지든, 광고든, 영화든 좋은 문장이 보이면 분야 상관없이 수집했다. 때로는 문장 한 두 줄 수집하기도 하고, 운이 좋은 날은 문단 하나를 통째로 수집하기도 했다. 눈송이 쌓이듯 시간이 쌓여 어느덧 수집한 문장들이 대학 노트 한 권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전염병이 덮쳤다.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몹쓸 병이 세계를 휩쓸었다.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닫았다. 문도 닫고 관계도 닫았다. 살아남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관계가 닫히자 살기는 어려워졌다. 그런데 시간은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생각만 해 왔던 일들을 시작했다. 공책의 문장을 컴퓨터에 옮겼다.
컴퓨터에 옮기면서 오래된 기억도 소환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따라왔다. 호기로운 문장 속에 담긴 팔팔함이, 따뜻한 문장 속에 풋풋함이 주저리주저리 따라왔다. 사는 것의 갈피를 잡아 줄 문장이나, 지식을 넓혀줄 문장 속에서도 문장을 읽었을 시절의 모습이 스며있었다. 공책에 담긴 문장은 오래된 기억과 함께 컴퓨터에 복제되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공책에 적는 일은 줄어들었다.
수집한 문장들을 보고 싶을 때마다 컴퓨터를 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컴퓨터를 켜지 않고 수집한 문장을 보기 위해 종이책처럼 만들기로 했다. 인쇄된 종이를 손바느질을 해서 제본했다. 동영상 속의 책바느질을 보며 한 땀 한 땀 책을 만들어갔다. 도톰한 종이로 표지도 만들고, 표지에는 그림도 그려 넣었다. 제목을 달았다. 책 한 권을 읽고 하나의 문장을 얻으면 잘 읽은 것이라는 학부 시절 교수님 말씀을 떠올리며 '오래된 문장 하나를 찾으러 글숲을 거닐다'로 정했다. 너무 길다고 느낄 때면 '글숲을 거닐다'로 줄였다. 그마저도 길다 느낄 때는 '글숲'이라 부른다.
매년 일월이 되면 전년도에 수집한 문장을 모아 '글숲'을 묶는다. 몹쓸 전염병은 그쳤지만, '글숲'은 그치지 않았다. 통합본을 시작으로 매 년 한 권씩 묶었다. 누구에게도 내놓을 수는 없지만, 책꽂이에 나란히 꽂힌 '글숲'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티끌은 모아 봤자 티끌이라지만 티끌 모으듯 모은 문장은 책이 되고 숲이 되었다. 오늘도 글숲에 문장 하나를 찾으러 간다.
바쁠 때 되려 여유를 찾는다더니, 베타 버전 퇴직과 연이은 정식 버전 퇴직 이후에, 오히려 책 읽는 양은 줄었다. '글숲'이 갈수록 얇아졌다. 게을러지는 것은 어떻게든지 표가 난다. 얇고 길게 가는 것이 삶의 목표는 아니지만, '글숲'만큼은 얇고 길게라도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