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의미
어린 시절의 나는 유난히 일기 쓰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또래 친구들은 일기 쓰기를 싫어해서 일기 쓰기 숙제를 미루다가 결국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나기 일쑤였는데 당시 나는 그런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이야기를 마음껏 담아낼 수 있는 일기 쓰기는 일종의 놀이 행위로 치환되었기에, 나는 하루에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일기가 쓰고 싶었다. 여행을 갔다가 밤늦어서야 집에 들어오더라도 반쯤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고집스럽게 의자를 당겨 책상에 앉았다. 연필로 꾹꾹 눌러 나의 하루를 일기장에 구겨 넣고 나서야 마음 편히 침대에 누웠다. 아홉 살 즈음의 여름이었던가, 우리 가족이 할머니 댁으로 며칠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이 때도 가방에 일기장과 연필, 지우개를 가장 먼저 챙겼다. 다들 잠든 깊은 밤, 혼자 일기와 필기구를 옆구리에 낀 채로 까치발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불을 켜놓은 채 해묵은 앉은뱅이책상을 펼쳐 일기를 쓰고 나서야 엄마 옆으로 와 베개를 꼭 안고 편히 잠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늘 하고 싶은 말이 넘쳐흘렀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경탄을 금치 않았으며, 어린아이의 눈에 신비로워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아기 때부터 이 세상에 내뱉고 싶은 단어와 문장들이 많았는지, 엄마는 내가 말을 무척이나 빠르게 뗐다고 증언하시곤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참 영특했다고 칭찬하시며, 당시를 회상하시는 엄마의 얼굴에는 추억과 그리움이 사르르 번진다. 사실 알고 보면 나는 영특하기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수다쟁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 분야에 있어서 빠른 법이니까. 어린 내가 사물, 자연 같은 만물들에 대해 의견을 덧붙이며 쫑알거리는 것을 보고 주변 어른들은 처음에 신기해하시고, 기특해하셨지만, 결국 나의 수다에 흥미를 잃고 귀찮아하셨다. 아이들의 대화란, 늘 그렇듯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사뭇 유치하기 마련이다. 어른들의 시선에는 극히 당연한 현상들을 마치 우주의 비밀을 발견한 듯 과장을 섞어 말하기도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주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을 테니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덟 살 즈음, 대화 상대를 찾아 헤매던 나는 우연히 <안네의 일기>를 읽게 되었다. 당시 <안네의 일기>가 시사하는 역사적 충격과 비극을 속속들이 이해하기에 나의 인지적 발달 수준은 미숙했다. 어렸던 나는 안네의 일기에 담긴 역사적 비극과 자유를 억압당한 개인의 삶이라는 '큰 숲'적인 부분보다,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일기장을 마치 친구처럼 여기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부분에 집중했다. 일기장에게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들을 가감 없이 써 내려갈 수 있으며, 일기장은 내가 아무리 길게 수다를 늘어놓아도 결코 지쳐 제 풀에 꺾이지 않으리라. 일기장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전제가 확실하다면 나의 기쁨, 슬픔, 두려움, 질투, 열등의식, 증오 등의 감정과 생각을 순도 높은 솔직함으로 녹여낼 수 있으리라.
머지않아 나는 자물쇠가 걸려 있는 두꺼운 일기장 하나를 구했다. 안네가 일기장을 키티라고 명명했듯이 그 일기장에 '줄리'라는 이름을 지었다. -당시 내가 즐겨 읽던 책의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것으로 기억한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내가 일기장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일기장은 나에게 문구점에 즐비한 흔한 일기장이 아닌, 나의 벗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안네가 그녀의 일기장 키티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일기장에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안네는 유대인 탄압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은신 생활이라는 처지로부터 비롯된 답답함을 일기장에 해소했다면 나는 진솔한 대화 상대의 부재라는 개인적 상황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지극히 개인적 특성으로부터 비롯된 답답함을 일기장에 해소했다. 선생님으로부터 야단맞은 날에는 선생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써 내려가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낯 간지러운 짝사랑 이야기, 비록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유치한 고민이지만 당시에는 인생이 걸린 듯했던 진지한 고민들을 적어 내려갔다.
일기를 적어 내려가며 가끔은 나는 스스로도 몰랐던 나의 면모를 발견했다. 스스로의 진면모를 발굴하고 마치 오랜 유물을 극적으로 발견한 고고학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내적 탄성을 질러대곤 했다. 나는 타고나기를 예민한 사람이라 온갖 잡다한 감정과 감각을 잘 받아들이고, 느껴왔다. 경사진 계곡에 물 흐르듯, 때로는 내가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이 빠르게 흘러가곤 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로 신경계를 파고들어, 섞여버린 감정의 색깔에 정작 감정 하나하나의 면모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혹은 여러 감정이 급격한 속도로 스쳐 지나곤 해 내 감정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한 채 흘러 보낸 적이 많았다. 잡다한 감정과 생각을 흘려보내고,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하루지만 작게 쪼개어 속속들이 살피면 결코 여느 날과 같지 않은 그런 일상을 겪어낸 후, 푸른빛의 고요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았다. 편한 옷을 입고 조용한 방에 앉아 단정한 글씨체로, 일상을 정리해 내려가다 보면 자연스레 내 감정의 자취를 뒤밟았다.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헨젤이 침착함과 절박함의 양면적인 마음을 품고 조약돌을 주워 집을 찾은 것처럼, 감정을 하나하나 들춰내고 본 형상을 찾을 수 있도록 문질러댔다. 말쑥해진 감정과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나면 그동안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이 나오기도 했고, 감정의 진 면모를 발견했다는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일기 쓰기 행위의 빈도수는 점차 뜸해졌다. 부모님에게 일기장을 들켰다던지 등의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일기에 일상이나 마음을 털어놓는 행위보다 5분 더 자는 것,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자습하는 것,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등의 각종 우선순위가 생성되자 일기 쓰기는 자동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났다. 무엇보다도 평일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급우들, 선생님들과 학교에서 하루를 보내고, 주말에는 학원에 전전하거나 어둠을 좋아하는 벌레가 된 것처럼 칙칙한 독서실로 파고드는 하루를 기록할 가치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싹텄다. 쳇바퀴 같은 하루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런 길고 긴 쳇바퀴의 기로를 굳이 기록해서 간직하고 싶지 않았다. 폭풍 같은 사춘기가 막을 내리자 자연스레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으로서의 나날이 연결되었다. 마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자연스레 환승하듯 사춘기 열차에서 수험생 열차로 갈아타 묵묵히 성인이 되기 위한 수많은 정류장들을 거쳤다. 공부 시간이 부족해서 수면 시간을 줄이고,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면서도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목표로 한없이 손을 뻗어대고 스스로의 한계에 좌절했던 수험생 시기에 일기를 작성하는 것은 사치였다. 길고 어두운 터널 같던 수험생의 시기에서 벗어난 이후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허나 일기 쓰는 법을 잊고 어른이 된 나는, 사진 몇 장을 sns에 업로드하는 것으로 청춘의 사금 같은 기록들을 대신하곤 했다. 휴대폰 카메라에 초점을 맞춘 채 카메라 셔터가 눌리기 전 몇 초간 세상을 제대로 즐기고 만끽하고 있다는 표정을 꾸며내고, 곧바로 무표정으로 전환했다.
최근, 다시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별다른 계기는 전무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서 드라이브로 몇 년 전에 찍은 여행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듯한 푸르른 생기를 머금은 자연들, 인간의 조형 감각에 대한 감탄을 자아내는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그리고 이색적인 맛과 형태를 띤 음식들... 사진 속의 내 표정은 복사해서 붙인 것처럼 일관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연의 품에서, 건축물에 기대어, 이색적인 음식이 담긴 큼지막한 그릇을 들고 동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을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이 사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내가 방문했던 곳이고, 만끽했던 시간들이 존재했으며, 경험했던 것들인데 당시의 내가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삶의 진리에 대해 깨우친 것이 있는지, 심지어 내가 간 곳이 어딘지, 내가 기대고 있는 건물의 명칭은 무엇인지마저 회상해 내기 어려웠다. 사진 속의 나의 일관된 미소만으로는 내가 당시 무엇을 했는지 유추해 낼 수 없었다. 아, 찰나의 사진만으로 나의 경험과 생각, 감정을 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지나가고 있는 시간들을 한껏 움켜쥐려고 노력해 보아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무의미해지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록함으로써 나의 생각과 감정, 경험의 흔적을 간직해내고 싶었다. 언젠가는 사그라들 젊음과 자유로이 음미해 가는 시간들을 마음속의 상자에 고이 접어 보관하고 싶었다.
일기를 쓰게 된 본래의 목적은 삶의 자취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었으나 일기를 쓰며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고 느끼고 있다. 일기를 써 내려가며 나를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며, 스쳐갔던 수많은 감정들과 생각을 복습해 나가며 나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품은 사람인지 명확화 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게 되었으며, 마음 깊이 흉터가 된 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을 정리해 나가며 스스로를 치유해나가기도 한다. 가끔 주변에 삶이 힘들고 외롭다고 토로하는 지인들이 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일기 쓰기를 권유한다. 거창하게 써 내려가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성찰해 나가고 삶을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배우고 치유하는 과정이 분명 존재함을 믿기에. 내가 얻었던 치유의 과정을 그들도 경험했으면 한다.
요즘 유행하는 sns는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병들게 한다고 느낀다. 몇 장의 사진, 자극적이고 짧은 영상과 글이 주를 이루는 sns의 양상은 사람들로부터 깊은 사유나 성찰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람들을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며 이러한 자극에 서서히 중독되게 한다. 누군가의 삶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사진을 보고, 타인의 삶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혐오와 조롱이 담긴 짧은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서로 공격을 주고받게 하고 결국 모두를 상처만 남은 패자로 귀결시킨다. 때로는 자기 과시적인 사진들, 혐오와 조롱이 즐비한 짧은 글들이 유행하고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sns가 아닌 정갈하고 진실된 글을 써 내려가는 sns가 유행하는 날을 꿈꾼다. 삶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신의 깨달음으로 타인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며 사랑이 마른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감처럼 자연스레 퍼져 나갈 수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 그런 sns. 조금은 느리지만 세상을 서서히 비추어주는 그런 sns. 과연 그런 sns가 널리 퍼지는 날이 도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