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몸을 존중하고 사랑해 왔는가
작년이었나, 다이어트 시장에 '혈당'과 '간헐적 단식'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섭취하는 칼로리 자체보다 중요한 건 혈당이란다. 인슐린을 조절해야 결국에는 살이 찌지 않는단다. 간헐적 단식을 해야 소화기관은 휴식할 수 있으며 낡고 취약한 세포를 사멸시켜 건강한 세포를 재생시키며 노화를 막고 혈당 관리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유튜브도, 인스타그램 피드도 혈당과 간헐적 단식 이야기로 가득했다. 댓글에는 실제로 효과를 봤다는 간증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러한 혈당, 간헐적 단식 열풍은 비단 온라인 세계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오전에 지인을 만나, 아침을 안 먹었다길래 빵을 건넸다. 지인이 빵을 한 입도 베어 물지 않은 채로 가방에 넣더니 나에게 하는 말, "나 간헐적 단식하잖아."
평소 체중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내 몸의 유지력을 믿으며 배고프면 밤이고 낮이고 음식을 와구와구 밀어 넣던 나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아직도 이해 불가다. 유튜브에 등장하는 권위 있는 의사들에게 설득된 것이었을까, 아님 주변 지인들을 따라 하고 싶어 졌던 걸까. 갑자기 살을 빼겠다며, 혈당 관리와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간헐적 단식과 혈당 관리는 다른 다이어트 이론들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고로 나를 더 날씬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샘솟았다.
건강식으로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을 직장에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취향보다는 저칼로리, 식이섬유, 단백질에 집착해 메뉴를 골랐다. 지인들과의 약속으로 밖에서 식사를 시작할 때도 섬유질을 먼저 섭취해주어야 한다며 식탁에 놓인 야채류부터-야채가 없다면 김치나 깍두기라도- 의식적으로 입에 쑤셔 넣었다. 밀가루와 단순당은 혈당을 올리고 몸에 독소를 쌓는 주범이라며 매일 먹던 과자 같은 간식들도 단번에 끊어내 버렸다. 간헐적 단식 시간을 계산해 주는 어플을 깔아놓고, 단식 시간 동안은 아무리 배고파도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허기를 달랬다.
간헐적 단식과 혈당 관리 자체는 무척이나 훌륭한 이론임을 인정한다. 실제로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간헐적 단식을 시작하고 체중 감량을 이루어내고 건강을 되찾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맞는 방법이 모두에게 적합한 방법이 아니듯, 비극적 이게도 나에게는 적합한 방식이 아니었다. 간헐적 단식의 부작용으로 난생처음 폭식증에 걸리고 말았다. 일정한 시간 동안만 음식이 허용되는데, 그 시간 동안 강박적으로 음식물을 몸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위를 음식물로 가득 채우다 못해, 위가 음식물로 인해 부풀어 올라 고통스러워할 때까지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음식 허용 시간이 지난 후 오랜 시간 동안 공복으로 견디면 배고플 것이라는 불안감으로부터 기인된 행위였다. 내가 섭취했던 건 어쩌면 음식이 아닌 불안과 강박이었다.
게다가 음식을 제한하다 보니, 빵이나 떡 같은 탄수화물 종류의 음식들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다. 친구들이 빵집 투어 할 때, '나는 빵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라며 뒤로 빠져있던 나였는데. 평생 빵이나 떡을 즐겨 먹었던 적이 없던 나에게 새로운 욕망 주머니가 생성된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도한 탄수화물 절제와 탄수화물의 죄악시화가 이러한 욕구를 부추겼던 것이다. 인간이란, 무언가 하지 말라고 금지하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
정신은 계속 피폐해져만 갔고, 강박과 욕구불만 사이에서 허덕이는 나날들이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유의미한 체중 감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정상 범위의 체중이었기에 간헐적 단식과 혈당 관리로 체중을 줄인다는 건 몸에게 무리한 요구이자 혹사였던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크고 작은 신호들을 무시하다가, 생리불순을 겪고 나서야 간헐적 단식이 나에게 맞지 않는 방법임을 뒤늦게 인정했고, 스스로 쌓아 올렸던 고집에 항복했다.
간헐적 단식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결핍되었던 영양소가 충족되었는지 규칙적인 월경이 시작되었다. 가볍게 비친 생리혈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리가 반가웠던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스스로를 가두었던 길던 악몽의 시간은 모두 지나갔으며, 이제 정상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것이라고 안심했다. 그러나 나의 과신에 콧방귀라도 뀌듯, 폭식은 멈추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하던 시간 동안 몸이 보냈던 수많은 경고들을 무시하고 욕구들을 억누른 결과는 참혹했다. 그간 쌓아 온 업보를 돌려받는듯한 고통의 시간은 지속되었다.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를 멈추기 어려웠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단정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봉인이 해제되듯 냉장고 앞에 주저앉았다. 보이는 음식을 무작위로 집어 먹는 시간들이 지속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은 짙어졌다. 나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꼴에 과연 무엇을 해낼까 싶어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다이어트도 실패한 것에 모자라, 폭식증이라는 혹까지 얻어버린 것이다.
자기혐오의 연속이었던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며 로션을 바르며 피부결을 손가락 끝으로 느껴 보았다. 좁쌀 여드름과 트러블로 오돌토돌하던 얼굴이 왠지 정돈된 것만 같았다. 주기적으로 올라오던 트러블이 최근 들어 올라오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대학생 때는 피부 트러블로 피부과도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나였는데. 문득, 간헐적 단식과 -그럼에도 앞으로는 결단코 시도하지 않을테지만-과 혈당관리가 나에게 내린 것은 저주뿐이 아님을 깨달았다. 섭취하는 음식의 종류를 신경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독 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간헐적 단식과 혈당 관리의 주목적은 체중 감량이긴 했지만, 소가 뒷걸음질 치듯, 엉겁결에 평생의 악연인 줄로만 여겼던 피부 트러블의 악의 축이 끊겼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오랫동안 지녀왔던 신체 혐오에 대한 속죄와 평생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 없다는 후회가 지저분하게 뒤섞여 범벅이 되었다. 평생을 걸쳐 농축되어 있던 지저분한 감정은 한참 동안 뺨을 타고 내려와 목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한 번이라도 내 신체를 온전히 사랑해 본 적 있는가. 어느 날에는 거울을 보면 스스로의 못난 모습만 돋보기로 확대하듯 부각되어 보여 화장실, 복도에 달려 있던 모든 거울을 외면하곤 했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엔 미움과 증오로 부풀어 오른 손아귀로 살덩이를 마구 꼬집곤 했었다. 이 살덩이만 사라지면 더 날씬해질 텐데 한탄하곤 했다. 피부의 트러블을 가리려 화장을 몇 겹이나 덧칠하며 모공의 숨 쉴 여지마저 막아버렸다. 젊은 몸의 기능을 과시하며 낮이든 밤이든 먹고 싶은 음식을 마구 먹던 과거와, 체중 감량만을 바라보며 정신과 신체에서 보내오던 경고를 무시하던 과거. 나는 평생 몸을 혐오하며 학대하며 살아왔다. 혐오와 학대는 일상이 되고 점차 무뎌져 스스로 가하는 행위가 혐오인지마저 망각하고 말았다. 평생을 혐오와 학대로 짓밟혀온 몸뚱이가 무슨 수로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나의 몸을 대접해 주리라 다짐했다. 활력 가득한 세포를 만들어내기 위해 신선하고 건강한 식품들로 몸을 채우리라. 밤늦게 음식을 먹으면 소화기관이 쉴 새 없이 일해야 해서 무리가 가며 소화기관에게 야근을 강제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에게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소화기관에도 적절한 휴식을 제공하리라. 다이어트 목적이 아닌 원활한 혈액순환과 신체 기능의 활성화를 위해 적절한 운동을 하리라.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에 번뇌를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평화와 휴식을 선물하리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내가 아닌 진정한 나 스스로를 위해. 나를 대우하고, 사랑하리라.
처음으로 내 몸을 온전히 존중해 주었다. 배고프다는 신호가 오면, 몸에서 에너지가 더 요구되는 것이겠거니 하고 평소보다 열량을 더 섭취해 주었다. 되도록 건강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세포와 신경 하나하나에 건강한 에너지를 제공하려 했지만, 특정 음식에 대한 갈망이 지속되면 스스로를 너무 억누르지 않고, 적절하게 갈망을 해소해 주었다. 쾌적한 생활을 위한 적절한 근육과 심폐지구력을 위해 운동을 지속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몸의 군살이 정리되기 시작했으며-sns에서 찬양하는 마른 몸은 아니지만. 애초에 이런 목표는 더 이상 갖지 않을 것이다-, 생리 주기가 규칙적으로 되었으며, 피부의 트러블이 거의 생기지 않게 되었다. 피부결은 이전보다 매끈해졌다. 이전에는 아침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하기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지구가 멸망했으면, 세계에 대한 작은 원망을 만들어내곤 했는데, 이제는 아침에도 피로보단 활력이 솟아났다. 스스로 몸의 단점을 지적하고 혐오하며, 단점을 개선하는 데에 집중하여 몸부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결과였다. 마치 새로운 차원의 건강과 활력을 몸에 달게 된 느낌이었다.
평생을 미워했던 몸에게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몸에게 사과를 건넸다. 항상 타박하고, 구박하고, 미워해서 미안하다. 때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충분히 잘하고 있는 너를 학대해서 미안하다. 앞으로 너를 사랑해 줄게. 존중해 줄게. 너에게 좋은 것만 대접하려고 할게. 너를 더 믿을게.
결국 나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폭식증을 극복해 냈다. 아니, 극복을 넘었다. 몸도, 정신도 더 건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