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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전하는 마음

편지지 충동구매가 가져온 변화

by mz교사 나른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줄곧 편지를 써서 건네고는 한다.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며, 평범한 날 소소한 간식을 챙겨주며, 그들이 어렵거나 힘들거나 혹은 축하할만한 일을 겪고 있을 때에도... 며칠 전에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언니와 점심 약속이 있어 여행지에서 기념품 삼아 사 온 쿠키와 함께 편지를 건넸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언니가 ‘편지가 너무 감동이었다'라고 보낸 메신저를 읽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편지는 더 이상 필수재가 아니다. 소셜 미디어의 대중화로 주변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전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메신저를 손쉽게 전송할 수 있다. 오늘날 편지는 내용 전달의 수단보다 애정이나 정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당신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수단. 당신만을 위해 종이에 글자를 꾹꾹 눌러 담는 시간을 가졌을 정도로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보이는 은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편지를 자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인들에게 편지를 자주 쓰게 된 계기는 우스우리만큼이나 단순하다. 그저 편지지가 많이 생겨서이다.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을 맞이해 편지를 쓰려고 문구점의 편지지 코너로 향했다. 편지지 세트 딱 하나만 사서 나올 생각이었는데 편지지들의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왜 그리 눈에 띄었는지. 알록달록한 색감과 귀여운 캐릭터의 유혹을 왜 뿌리치지 못했는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편지지를 한 뭉텅이나 샀다. 그러고 나서도 편지지는 일 년 넘게 서랍장에 방치되었다. 서랍장을 여닫을 때마다 편지지가 걸리적거려 쓰레기통에 넣어버릴 뻔한 충동도 몇 번 겪었다.


거추장스러운 그 편지지를 소진해버리고 싶었다. 어느 날엔가 원플러스 원으로 선크림이 두 개나 생겼다. 두 개 다 쓰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하나는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그마한 쇼핑백에 선크림을 챙겨 넣었다. 문득 편지지도 소진할 겸 간단한 편지를 같이 끼워 넣으면 조금 더 그럴싸할 것 같은 예감이 찾아왔다. 드디어 서랍장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서랍장에 오래 두어서인지 모서리가 약간 꼬깃해졌지만 여전히 화사한 색감에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매력적인 편지지였다.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솔직 담백하게 적어 내려갔다. 친구는 의외로 선크림보다 편지에 더 기뻐했다. 그 친구의 화사한 미소가 편지의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일을 계기로 가족에게, 애인에게, 친구들에게, 친한 직장 동료에게... 편지 쓰는 빈도는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처음에는 편지지가 식상한 문장들로 채워지기 십상이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랑한다, 건강하자, 앞으로도 자주 보자... 참으로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내용이지만 흐뭇한 표정을 띠며 미련 없이 전투를 마친 장군처럼 과감히 펜을 내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펜을 내려놓는 나의 표정에는 늘 아쉬움과 찜찜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 문장들은 우리 관계를 정의할 정도로 특별하지 않았다.


감정과 관계의 특수성을 언어화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감정과 관계 같은 비가시적인 요소들을 실체 그대로 언어로 변환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세밀화 작가가 피사체의 형태, 양감과 질감을 최대한 실제처럼 묘사하고 싶어 하듯 최대한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싶었다. 크고 작은 굴곡을 그려내며 초를 다투며 변하는 미묘한 감정을 언어만으로 나타내는 것의 답답함은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고 한껏 멋을 낸 여성을 검은색 펜으로만 묘사해야 하는 화가의 심정과 같을 것이다. 나의 어휘력과 필력의 부족함에 대해 자조하는 동시에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몸소 체험하는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편지를 받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해하는 지인들이 있어 편지를 자주 쓰다 보니 더디지만 감정을 그려내고 채색하는 능력이 꽤나 늘었다. 식상한 문장들의 나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같아 좌절하며 감정 따윈 없는 ai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해도 이것보다 낫겠다며 자조한 결과물을 건넸음에도 지인들은 행복해했다. 편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다나. 보잘것없는 몇 줄의 문장에 감동받고 기뻐하는 지인들을 보니 자꾸만 편지를 쓸 용기가 생겼다. 그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각인된 그들의 햇살 같은 미소들을 연료로 불을 피워 편지를 써 내려가고 써 내려가고 써 내려가니 감정 표현에 대한 어색함도 점차 사그라들어서일까. 낯간지러웠던 표현을 술술 써 내려가는 나를 보며, 내가 이렇게 능청맞은 사람이었나 싶기도 하다.


편지를 자주 쓰다 보니 은근슬쩍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글을 읽다가 신선한 표현이 등장하면 되새김질하듯 몇 번이고 읽어보고 입으로 살며시 읊조려본다. 갓 잡아 올린 듯 파닥거리는 그 신선함을 쭉 들이켜 소화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다. 영화를 보다가도 예술적인 문장을 발견하면 노다지에서 금을 캐내듯 조심조심 다가가 그 문장을 어루만져 조심스레 가슴팍에 숨긴다. 내가 발굴한 문장을 편지로 새로이 가공하여 소중한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내가 느낀 짜릿함, 얼얼함, 포근함 같은 농도 깊은 감정을 전염시키고 싶다.


계기가 어찌 되었든 간에 주위 사람들에게 편지를 건네기 시작하기 잘했다. 소중한 사람들이 내 편지를 읽고 한 번이라도 더 미소 짓는다면, 주변에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을 더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나로서도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더 진솔한 표현을 찾아 헤맬 수 있는 동기가 생겼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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