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삶을 다채로이 색칠하는 물감
12월은 시작부터 둥둥 들떠있었다. 볼의 가장자리를 스쳐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잔바람처럼 한시도 차분하지 못했다. 올해-이제는 작년이 되었지만-의 마지막 달이라며, 눈 깜짝할 새 일 년이 지나가는 게 지당한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하필 연말에는 내가 생일 다음으로 좋아하는 기념일인 크리스마스가 살포시 끼어 있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로맨틱하고 감성적인가.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핫초코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로맨틱한 분위기를 오래도록 우려내고 음미하고 싶어서 12월 내내 크리스마스 캐럴을 질리지도 않고 들었다.
12월이 저물어가자 요란스러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나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그다음에는 새해에 꽂혔다. 사실 ‘새해’라는 단어에는 양가의 감정이 존재한다. ‘새해’라는 단어는 ‘크리스마스’처럼 설렘과 달콤함을 연상시키는 단어와는 결이 다르다. ‘크리스마스’가 보드라운 마시멜로라면 ‘새해’는 달콤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이다. ‘새해’를 읊조리자면 새 출발, 시작, 백지 같은 희망찬 감정과 함께 늙어간다는 사실에 대한 씁쓸한 감정이 공존한다. 매해 한 살씩 정직하게 꼬박꼬박 먹는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날부터였을까. 그날부터 나는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 싫어졌고, ‘새해’라는 단어는 내가 한 살이 더 들었음을 어쩌면 한 살 더 늙었음을 공표하는 선언 같아 울렁거리기도 했다.
“새해는 좋은데 왠지 싫어. 직장에서 하는 업무도 바뀌고-계속 같은 업무만 하면 질리니깐- 새로운 일기장을 사고 달력의 첫 장을 펼치는 건 좋은데. 떡국을 먹으면서 새해 덕담을 나누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것 다 재밌는데. 이제 나이 먹는다는 건 왠지 싫어. 부모님이 한 살 더 늙어간다는 것도 싫고.”
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소감을 장황하게 이야기해 댔다. 어린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살짝 내밀면 쭉 늘어났다가 다시 쏙 들어가는 종이 장난감처럼 소감은 자꾸만 더 길어졌다. 쭉 늘린 소감은 질기도록 늘어나 끊기지도 않았다.
“으응. 그렇구나.”
샤부샤부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던 그는 숟가락에 국물을 절반쯤 얹어 홀짝대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적절한 대답과 끄덕거림 같은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적절히 섞어가며 경청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며. 담담한 끄덕임과 간결한 대답 그리고 숟가락과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한결같이 담담하고 견고한 그 다운 응대였다.
저녁 어스름마저 짙어진 지 오래인 열두 시가 되어가는 무렵. 고요한 아파트 방 한편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건 보신각 종소리 생방송을 들으며 함께 새해 카운트 다운을 외쳐야 비로소 새해가 온 것 같다는 나의 고집이었다. 내 곁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그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의 거친 들숨과 날숨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에게서 한 해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해가 도래한다는 기념비적인 시간에 대한 감흥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새해를 축하하자는 나의 고집에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그였기에 피곤함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10! 9! 8! 7! 6! 5! 4! 3! 2! 1!”
새해 카운트 다운의 갈무리에 맞추어 보신각 종이 울렸다. 새해에 대한 소망과 염원이 한가득 담겨 무거워져서일까. 경쾌하기보다는 은은하고 무게감 있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종소리였다. ‘다음에는 텔레비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가서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카운트 다운도 외치고 싶다’며 중얼거리며 은근 나의 희망사항을 내비쳤다. 새해의 소망을 잔뜩 이고 있는 사람들과 새해의 환호와 기쁨을 나누며 현장감 있는 종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새해가 활기찰까. 나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찬찬히 휘저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노래 부르는 한겨울의 한밤중, 새해의 소망을 가보처럼 가슴에 품고 모인 무수한 인파들.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는 눈치였다.
가족, 친척, 가까운 지인들에게 새해 덕담을 눌러 담은 메시지를 보내놓고 나서야 불을 끄고 누웠다. 새해에 대한 양가감정을 억누르며 뒤척이다 늦게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지만 이른 아침에 벌떡 일어났다. 새해 첫 일출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어스름이 갓 걷힌 하늘은 칙칙했고 이슬을 한입 가득 머금은 새벽의 공기는 습했고 냉기가 서려 있었다. 여전히 비몽사몽 한 상태였던 그를 흔들어 깨웠다. 두꺼운 옷, 목도리, 비니로 단단히 무장한 채 집 밖으로 나섰다.
“넌 참 의미부여의 귀재야.”
기어이, 끝끝내 새해 첫 일출까지 함께 맞이한 후 집으로 돌아서는 길에 그가 말했다. 약 한 달간 지속된 요란스러움을 함축한 문장이었다. 연말인데, 크리스마스인데, 그리고 새해인데 그저 평범하게 보내면 허전하지 않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허허 웃었다.
“그냥 나에게는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하루일 뿐이거든.”
내가 그토록 요란스럽게 보내왔던, 각종 수식어가 덕지덕지 덧붙어있는 기념일이 그에게는 그저 삶의 일부인 ‘하루’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
“아니, 그건 아니야. 재밌어. 나 혼자였으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채 지나갔을 날들인데, 너랑 함께하며 그런 날을 챙기다 보니 인생이 좀 다채로워진달까.”
담백하지만 다정한 그의 대답에 내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굳이’ 싶은 내 일상을 함께하며 지루하거나 귀찮은 나날도 분명히 있었지만 뒤돌아보면 그런 날 때문에 삶이 더 즐거워졌고, 추억이 생겼다는 그의 부연 설명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굳이’. 요즘 들어 특히나 나와 관련 있는 단어다. 냄비째로 꺼내 먹으면 설거짓거리도 줄어들 텐데 굳이 예쁜 식기에 덜어 먹는다. 온라인 당일 배송도 가능한 초고속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굳이 에코백을 메고 밖으로 나와 주변 슈퍼로 향한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카페에 가면 편할 텐데 굳이 꾸민 채 밖으로 나와 기분을 낸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삶은 이전보다 단조롭고 정돈되었다. 단어를 약간 바꾸어 말해보자면 삶의 양상은 지나치게 반복되었고 지루해졌다. 처음에는 귀찮으니까, 굳이 무언가 삶에 더하고 싶지 않아서 꼭 해야 할 일들만 해냈다. 그렇게 얼마간 지내다 보니 삶이 고요하고 단정했지만 자꾸만 따분하고 우울해졌다. 밋밋한 우유 케이크에 휘핑을 짜내고 과일 몇 조각을 토핑으로 올려대듯 밋밋한 삶을 조금씩 꾸미기 시작했다. 예쁜 식기, 직접 만들어 먹는 간식, 음악을 들으며 느지막이 걸어보는 천변 산책,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음미하는 음식, 소소한 전시회.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 설, 생일, 발렌타인 같은 기념일들은 무척이나 고마운 날들이다. ‘굳이’ 싶은 조금은 색다른 경험들에 명분을 불어넣어 주는 데다가 그날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지에 대한 테마 까지도 부여해주는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에는 예쁜 트리가 놓여있는 카페를 가고, 백화점에서 향수나 립스틱 같은 자그마한 것들을 고르고. 설에는 떡국을 먹고 친척들과 함께 덕담과 함께 정을 나누고. 생일에는 케이크와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선물을 기대하고.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을 만들거나 고르고 선물하고. 누군가는 상술이라고 여기는 날들이더라도 나에게는 삶에 활기와 색채를 입혀주는 고마운 날들이다.
앞으로도 나의 ‘굳이’ 싶은 일상은 계속될 예정이다. 진부하고 고요한 삶에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나만의 색채를 입혀 삶에 탄력을 부여하기 위해. 소중한 사람들이여, 나의 ‘굳이’ 싶은 일상에 동참해줄 수 있겠는가. 나와 함께 삶에 약간의 변화를 부여함으로써 더 다채로워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