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려낸 그 사소함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황동규, 즐거운 편지)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언제고 망설임 없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꼽을 것이다. <즐거운 편지>는 국어 교과서를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보석이자 은인 같은 시이다. <즐거운 편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과 충격은 여전히 나의 뇌리 깊숙이 자리한다. 시 한 편 안에는 한치의 허황도 허용되지 않은 진솔한 문장들이 정갈하게 짜여 진실함의 결정을 이루고 있었다. 언젠가는 터뜨려지고 사그라들 거품 따위 없는 담백한 정수의 언어들이 고이 담겨있었다. 한참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인 고등학생 시절, <즐거운 편지>를 읽으며 소박하고 진실뿐인 사랑을 꿈꿨다. 짧은 글귀를 몇 번이고 읊조리며 마음 한켠에 소중히 떠다 담았다.
이 시를 만난 후, 몇 번의 사랑을 했고, 언젠가는 절망의 골짜기에서 허우적댔으며, 희미한 희망의 불빛에도 옷깃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은 날도 있었다. 한 발짝 더 걸어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힘겨운 나날을 지나왔으며, 삶의 나침반이 고장 난 채 한없이 주저앉은 시기도 존재했다. 삶은 기승전결이 깔끔하게 정돈된 영화가 아니다. 누구도 희망의 ‘결말’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삶의 행복과 희망의 ‘결말’이 있음을 스스로 믿고 그 희미한 믿음의 방향을 따라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나에게는 어떠한 초능력도 기능도 허락되지 않았다. 깊고 얕은 나락과 절망, 좌절과 포기의 어귀를 빨기 감기 같은 기능도 탑재하지 않은 채 정직한 속도로 타박타박 걸어 지나갔다. 희망의 불빛마저 희미했던 나락의 한복판에서 나를 구원했던 건 언제나 사소함이었다.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 그 사소함이야말로 나를 구원했다.
사소함은 일상적인 평안 속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평안과 안식은 존재만으로 강렬하며 안정적인 온기를 송신해 대는 빛과도 같다. 이 화사하고 강렬한 빛의 영향권 안에서는 사소함이 사활을 다해 끊임없이 뿜어대는 희미한 빛을 미처 실감하지 못한다. 사방이 새하얀 조명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백화점 안에서 희미한 반딧불의 불빛의 조도와 밀도를 실감하기 어렵듯이. 평안과 안식의 영향권 안에 머무르는 은혜로운 나날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에서 사소함의 존재성은 서서히 더 옅어진다. 그러나 그 영원 같은 은혜로운 나날은 언젠가 기어코 나를 벗어나고야 만다. 평안이란 달걀 껍데기만큼이나 연약하기에 삶의 사소한 진통에도 깨어지고 쏟아지고야 만다. 넓고 납작하게 쏟아져 노른자까지 드러내고 만다. 태풍의 영향권이 결국엔 서서히 이동해 나가듯 그러다 결국 평안과 안식은 어느 순간 나를 비켜 벗어나고야 만다.
평안이 자리를 떠난 그날, 나에게는 움집도 처마 끄트머리도 허락되지 않았다. 온전히 연약한 육체 하나만으로 온 세상의 한기를 비참히 맞닥뜨렸다. 평안과 안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마자 서서히 절망과 불안의 어두움은 다가왔고 짙은 손아귀에 내몰려 바들바들 떨어대고야 말았다. 그 누구도 기약하지 않았던 평안함의 영속성을 홀로 무심결에 믿고 있었기에 배신감에 끓어올랐고, 동시에 허망함과 속절없음을 느끼며 차게 식었다.
희망 같은 건 바랄 수도 없었던 그날, 최후까지 머물러 함께 한기를 맞아주었던 건 사소함뿐이었다. 칠흑과도 같던 극도의 절망에서 나는 한 마리의 나방이 되어 희미한 사소함을 찾았다. 불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사소함이 은은히 내뿜어대는 연한 빛에 온 감각과 균형을 의지했다. 사소함은 성질 자체가 희미하고 옅기에 처마나 병풍 따위가 되어 온전한 안식처를 주진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캐묻지 않은 채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다,
무심한듯하면서 다정한 친구들의 안부 연락, 부모님의 애정 묻은 염려, 남자친구와 먹는 뜨끈하고 맛있는 음식들, 어느 날 무심코 집어 든 책의 한 페이지, 길가에서 마주친 아이보리 빛깔의 풀꽃,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포근한 스웨터, 구수하고 뜨끈한 시금치 된장국... 늘 곁에 있었기에 당연했고, 평안 속에서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사소함들. 그 성긴 사소함들이 모여 나를 지지해 주었다. 모진 파도와 거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평소에는 마치 배경과도 같아 존재감이 희미하고 당연시 여겨지던 그 사소함이 고뇌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관조로운 손길을 내밀었다. 결국엔 나를 살렸다.
고로 나는 사소함의 부드러우며 침묵스러운, 잔잔함과 동시에 담담한 힘을 사모한다. 사소함 덕에 절망과 고뇌의 순간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기에, 나도 누군가의 배경과 같은 사소함이 되고 싶다. 다정한 안부 연락 한 통, 사랑하는 이에게 문득 전하는 꽃 한 송이, 소소한 칭찬 한 마디, 곁에 머물러줌으로써 은밀히 보내는 지지의 표현. 그들에게 배경 같은 사소함을 은은한 등잔불처럼 흘려보내리라. 그 사소함을 그들은 미소 한 번으로 그저 지나치리라. 그럼에도 그들이 어느 날 슬픔이나 고뇌 속에서 헤맬 때 그 사소함은 그들이 지지할 수 있는 작은 버팀목이 되리라. 그날, 은은한 등잔불이 그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