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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어른이란

성인이 아닌 어른이 되고 싶은 자의 단상

by mz교사 나른이

내 나이, 한국 나이로 스물여덟. 이제는 ‘어른’이라는 칭호가 당연해 질만 한데도 여전히 어른이라는 명칭이 새삼스럽고 어색하다. ‘성인’이라는 명칭은 스무 살이 되는 새해가 되자마자 쉽게 달라붙었는데. ‘나 이제 성인이야!’ 호기롭게 외치며 술집에서 당당하게 신분증을 내밀곤 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어른’과 ‘성인’의 단어의 뜻이 다른 걸까.


국어사전 검색창에 ‘어른’과 ‘성인’을 검색해 보았다.

어른: 1.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2.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3. 결혼을 한 사람.

성인: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 보통 만 19세 이상의 남녀를 이른다.


나의 편협한 인식으로 기인된 편견이 아니었다. 사전에 검색해 본 결과로도 ‘어른’과 ‘성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자체가 다른 것만 같았다. ‘성인’은 만 19세 이상의 나이가 되면 누구나 쉽게 즈려밟고 통과의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반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의 나이에 다다르는 것은 필요조건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나이 외에도 성숙한 의식, 책임감 같은 요소들이 덧붙여져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인가?’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사회생활에 찌들어서인지 학생 시절보다 조금은 더 퀭해진 거울 속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일단 ‘다 자란 사람’에 해당하긴 한다. 신체적인 성장은 멈춘 지 오래니깐. 정신적 성장까지 ‘자람’의 범위에 포함시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사회적 통념상 다 자란 사람임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나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인 건 맞을까. 음, 바쁘게 휘몰아치던 사고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부끄럽지만 이 나이에도 힘든 일이 생기면 가족부터 찾고, 기분이 안 좋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툴툴거리기 일쑤인 철부지인 내가 과연 사회의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나는 어른일까, 아니, 진정한 어른이 될 수는 있을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되어야 해.’ 어느 날 알고리즘을 타고 휴대폰에 우연히 들어온 동영상의 짧은 대사 조각이 귀에 맴돈다. 풀려 있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았던 그 대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엔 ‘누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나’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반추해 보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 대부분의 공통적인 마음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학업 성적이 인생의 전부인 양 세상과 담쌓고 유년기와 청소년을 보내왔는데,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사 먹는 떡볶이가 최고의 일탈인 줄만 알고 지내왔는데, 아무런 준비나 유예의 단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제 성인의 나이가 되었다며 사회로 나가라고 한다.


처음에는 ‘성인’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성인의 자유라는 짜릿한 자극, 자유로부터 얻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었기에 그 무게와 책임감에 대해 고민할 마음의 여백조차 없었다. 신분증이 마치 마패라도 되는 것처럼 떵떵거리며 들고 다녔다. 그러나 처음엔 아무리 즐거웠던 것이라도 반복되다 보면 당연해다 못해 지겨워지는 지경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성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 후 더 이상 이러한 자유가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즈음-조금은 지긋지긋해질 때쯤- 성인이라는 사실이 덜컥 두려워졌다. 이제 내가 벌여놓은 일은 스스로 수습해야 하며 더 이상 어린 나이를 방패 삼아 실수를 무마시킬 수도 없으리라. 그러나 어찌하랴. 성인으로서, 나아가 어른으로서 나잇값 정도는 해내는 수밖에.


진정한 어른으로 불리기 위해 어떤 면모를 갖추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온전히 책임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른’의 정의에도 명백하게 명시된 필수적인 면모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대한 결과를 변명 없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그때마다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고르는 것이다. 점심 메뉴를 고르거나 사고 싶은 옷을 고르는 것처럼 어떠한 선택은 가볍다. 반면 어떠한 선택은 조금 더 무겁다. 이직을 해야 할지, 이직을 한다면 어떤 분야를, 직종을 선택해야 할지, 장차 다가올 미래를 위해 이사를 가야 할지... 가벼운 선택이든 무거운 선택이든, 한 번 선택을 했다면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받아들이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고개를 내밀지라도 이를 책임져야 한다.


이 세상에 더 늦게 당도한 인생의 후배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결코 꼰대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당장 나조차도 꼰대에 진절머리를 내는 사람이다. 꼰대는 자신이 옳은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의 삶에 사사건건 간섭하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듣다 보면 묘하게 맞는 말 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꼰대는 결국 꼰대일 수밖에 없고, 꼰대가 하는 말이 잔소리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꼰대는 ‘입만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성실, 정의 같은 미덕을 주장하면서도 기꺼이 모범 사례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특히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존중을 가벼이 여긴다. 그들이 아무리 입바른 말을 하더라도 그 말에는 진정성이 결여되었기에 힘이 없다. 꼰대가 아닌, 진정으로 인생의 후배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나침반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대해야 하는지. 인생의 후배들이 삶의 폭풍 속에서 비틀거릴 때 가벼운 판단과 참견을 내던지기보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며 진심을 담아 도우려 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면모만 갖춘다면 스스로 어른이라고 칭하는 데 부끄럼이 없을 것 같다. 이왕 하루하루 늙어가야 한다면 나이만 먹은 성인이 아닌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다. 때로는 순간의 판단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의 결과에 묵묵히 책임지는 성숙함을 지니고 싶다. 인생의 후배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생색내지 않으면서도 소소한 도움을 건네는 자상함과 세심함을 겸비하고 싶다. 과연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 스스로 규정한 어른의 지표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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