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된 I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놓였을 때 쭈뼛거리며 숨어버리지 않고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막힘 없이 해대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직장, 연애 같은 일상적인 주제를 마구 펼쳐 든 채 떠들고, 목젖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 댄다. 이렇기에 나와 가벼운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 설명되는- 사람들은 나를 명확한 ‘외향형 인간’으로 오해하곤 한다. 이들의 오해도 나름 일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 앞에서 조용한 자들을 내향형 인간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자들을 외향형 인간으로 분류하곤 하니까. 이들은 때로 킬링타임용 화두로 MBTI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그 질문에 내가 ‘I’ 형 인간이라고 대답하면 하나같이 충격을 금치 못한다. ‘전혀 I 같지 않은데요? 완전 E인 줄만 알았어요.’ 짧은 정적, 그 직후엔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나는 그때마다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아, 저는 사회화된 I에요.’라고 대답한다. 스스로를 대충 포장하며 얼버무리곤 한다.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나답지만, 26년 평생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어떻게 튀지 않고 자연스레 군중들 사이에 녹아나는지 학습했다. 이러한 사회화의 시간으로부터 내향적인 성향을 꽤나 그럴듯하게 감추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는 대화를 주도해 내기도 하고, 최대한 자연스레 그들과 섞이려 한다. 때론 이러한 노력이 너무 과해지고 만다. 자연스럽지 않은 과장된 말투와 표정을 분출해내고 만다. 과하고 부자연스러운 행위로 오히려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자괴감이 나를 감싼다. 몸 끄트머리의 머리칼부터 발끝까지 꽁꽁 감싸고 만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수치가 얄궂은 파도처럼 몰려온다. 스스로 실패한 광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을 풍자해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때, 마치 제삼자에게 읊조리듯 내면에 읊조린다. ‘너 진짜 우스꽝스럽다. 이럴 거면 과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급기야 읊조림의 마음을 꾸깃꾸깃 접어 내고야 만다. 내가 느끼는 어색함과 약간의 불편함을 남들에게 필터링 없이 투명하게 노출해 낸다면... 상상만으로 끔찍하기 때문이다. 모래처럼 텁텁한 공기가 나와 그들을 에워쌀 것이다. 어색한 그 공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채색의 표정으로 꾸역꾸역 씹어 삼켜야 할 것이다. 어색함은 독감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 나의 어색함은 공기 입자 사이사이에 낀 채 균일한 밀도로 공간 중에 퍼져 나갈 터이고, 나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인식한 타인들마저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낀 채 딱딱해질 것이다. 분위기도 덩달아 텁텁하고 딱딱하게 굳어 내리고 말 터이다.
이렇기에 결국 사회적 가면은 어쩌면 필연이다. 사회적 가면을 뒤집어쓴 채 나답지 않게 행동하는 행위 자체만으로 피로가 몰려온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닫힌 문을 등진 채 쏟아진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채 깨진 달걀이 흘러내리듯 아무런 저항 없이 흘러내린다. 달걀의 정중앙에 놓인 노른자마저 납작하게 흘러내리고야 만다. 아무도 없는 여백의 공간에 홀로의 시간을 마주한다. 텅 빈 그 공간에서는 어떠한 가장도 꾸밈도, 기교와 거짓도 필요치 않다. 그 꾸밈없는 공간에서 노른자를 드러낸 채 최소한의 움직임만 스스로에게 허용한다. 가장과 광대의 시간 끝에는 늘 이렇게 회복의 시간을 가졌고, 단연코 그 시간은 오롯이 나에 의한,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만 했다.
뽁뽁이를 여러 겹 두른 채 잘 감추어 둔 나의 다치고 싶지 않은 내면을 꿰뚫어 보는, 나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몇 지인들은 내가 ‘내향형 인간’ 임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들은 오랜 대화와 긴 우정을 통해 나의 습성을 익히 알고 있다. 내가 홀로인 시간을 통해 사회생활을 해 나갈 에너지를 충전시킨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홀로 보내는 시간이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넘어선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그 지인들은 나와 약속을 잡더라도, 내가 오롯이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해주곤 한다. “일요일 오후에는 혼자 쉬어야 하지? 그럼 우리는 토요일 저녁을 함께 먹을까?” 내가 홀로 보낼 시간까지 스케줄에 고려해 주는, 이들의 세심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배려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감격의 탄성을 내뱉는다. 오롯한 나의 시간을 생각해 주는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그들이 혀로 밀어내는 단어 하나하나를 성심성의껏 주워 담으리라 다짐한다. 그들의 미간, 입꼬리, 손끝으로 건네는 은유의 메시지 하나하나를 관찰해 내고 말리라.
제아무리 내향형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친밀하고 애틋한 그들에게는 조금은 진솔해진다. 가면 뒤에 감추어진 민낯까지 헤아리고 있는 그들 앞에서, 그 민낯에 대한 예의를 조심스레 지켜주려는 소중한 그들 앞에서는 어쩌면 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만 같다. 사회화의 가면을 한 겹 벗어내고 그들을 대한다. 나의 감정과 기분, 그리고 조금은 사적이고 연약한 삶의 양상까지 털어놓고야 만다. 평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애써 웃음 짓느라 입꼬리에 옅은 경련이 일어나고 입꼬리의 끄트머리가 가볍게 떨리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친밀한 이들과 있으면 감정에 더욱 솔직해진다. 웃기지 않으면 애써 웃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이들과 함께 있으면 작위적이며 은은한 미소를 띠기보다 단전에서부터 뻗어 올라오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일이 잦다. 신기하게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서적으로 충만해진 기분이 든다. 스스로 짜내고 소진하는 것만 같은 일반적인 사회생활과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나 같은 내향형 인간에게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가 제격이다. 내향형 인간이라도 결국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향형 인간이라도 견고한 홀로의 삶을 영원토록 지탱해 나갈 수는 없다. 결국 정서적 교류와 감정적 지지를 갈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명의 무작위의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교류하기엔 소모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너무나도 크다. 끊임없이 꾸며대는 거짓의 모습으로 무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정서적 담이 높아졌음을 인지하고 허탈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소위 ‘기 빨리지 않는’ 관계인 소수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사회적 체면으로 단단히 무장해야 하는 관계가 아닌, 조금은 솔직하고 풀어질 수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그런 관계. 소수의 사람과 맺는 그런 관계가 내향형 인간의 숨통을 열어주고, 지지대가 된다. 결국 그 소수의 사람들과 담쟁이덩굴처럼 얽히고설켜나가며 깊고 긴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소위 ‘인사이더’들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타인들과 어울리는 행위에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며, 정서적 교류 행위를 통해 삶의 원동력을 얻는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 타인을 자신의 삶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적 여유 공간이 넉넉한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맑고 건강한 것일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의 삶, 그리고 호기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오를 때도 잦다.
그러나 내향형 인간으로 이미 태어났으니 뭐 어떡하랴! 견고하고 단단한 돌과 텁텁하고 매끈하면서도 훑어내면 가루가 묻어나는 나무의 성질이 명확히 다르듯, 외향형 인간과 내향형 인간의 성품은 골수부터 다르다. 수많은 사람을 나의 삶의 무대에 초대하기엔, 나의 무대는 작고 연약하며, 소박하다. 지금처럼 적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나의 삶에 긴밀하게 들이겠다. 흙의 겉면에서 보이는 구멍은 조그맣지만 흙 속을 깊이 파내어 그들만의 융성한 왕궁을 창조해 내는 개미집처럼, 좁지만 깊고 건실한 인간관계를 창조해 내리라. 타인들과의 자리에서는 적당한 빈도의 말주변과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지금처럼 ‘사회화된 I(내향형 인간)’로서의 삶을 영위하겠다.-가끔 의욕이 과하다 못해 넘쳐, 오버스러운 몸짓과 말씨로 밤에 이불을 마구 발로 차는 불상사가 생기지만- 동시에, 그 소중한 소수에게는 나의 진심을 아낌없이 펼쳐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