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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도 사랑하니까

아빠와 나

by mz교사 나른이

‘아빠’의 또 다른 이름은 ‘애증’이다. 가족이라 조금은 더 솔직해져도 될 것만 같고, 가족이라 무엇이든 이해해 줄 것만 같고, 가족이라 감정을 애써 억누르지 않고 드러내게 되고... 가족, 단어만으로도 포근해지고 가슴이 찌르르 전류가 흐르는 두 글자에 기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실례를 저질러 왔던가.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아빠와 나는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아빠는 소위 ‘옛날 사람’이다. 당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곧 정답이라고 여기는 아빠와 스스로의 의견 피력에 거침이 없는 나는 유난히 갈등이 많았다. 아빠와 나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이를 강력하게 주장해 낸다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문제는 아빠와 나의 생각이 1부터 10까지 맞는 게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맞는 번호 따위 없는 로또라고나 할까.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속성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은 섞이지 않는다. 아빠와 안 맞는 것을 나열하자면 종이 한 페이지를 꽉 채우는 것도 부족할 것이다. '

그래도 간략하게 나열해 보자면 아빠는, 공무원이나 전문직이 지상 최고의 직업이라고 신봉한다. 경기가 안 좋으면 기업에서 내쳐질 수 있고, 사업은 위험 부담이 크다나 뭐라나. 반면 나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실존하며, 특정 직업 자체에 대한 가치보단, 자신이 잘 해낼 수 있고, 일할 때 즐겁고 보람된 직업을 찾아 나가는 것에 대한 가치를 크게 둔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직업을 지녔다고 믿는다. 아빠는 재테크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다. 주변에 과한 대출로 주식 투자를 하다가 집안이 어려워진 사례, 하루종일 주식 차트만 들여다보지만 매번 제자리걸음인 동료의 사례 이 두 가지만으로 재테크의 위험성을 일반화한다. 반면 나는, 늘 제자리걸음인 월급과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는 물가 상승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정한 선의 재테크는 필수적인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당신이 옳다고 믿는 일들은 입 밖으로 읊조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아빠의 차를 얻어 탈 때엔 귀마개라도 껴야 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과 불만을 나열해 대며 울분 섞인 흥분으로 털어놓곤 하신다. 나에게 말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얼마든지 털어놓아도 괜찮겠지만, 나도 소시민에 불가한걸. 해결되지도 않을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도돌이표 찍힌 불협화음을 들어주는 것은 괴롭다. 때로는 내가 직장 문제에 대해 가족들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아빠는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다’며 나의 어려움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신다. 한 유명인이 이러한 말을 했었다. ‘네가 힘들다고 해서 내가 안 힘든 건 아니다.’ 아빠 말마따나 나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일이 매끈하고 막힘없는 리조트의 물 미끄럼틀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가족마저 나의 힘듦을 몰라주는 건 서운한 일이다.


가끔 나와 아빠가 가족의 인연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공상을 펼쳐다 보곤 한다. 평행우주 같은 세계에서 만약 아빠를 아빠가 아닌 직장 동료나 상사로서 만나게 된다면? 보나 마나 아빠와 나는 서로를 탐탁지 않아 했을 것이다. 나는 아빠를 ‘꼰대’라고 칭하며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으려고 출퇴근 길 멀리서 보이는 아빠(평행우주 상에선 상사나 동료)를 보고, 일부러 발걸음을 천천히 떼어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아빠(평행우주 상에선 상사나 동료)는 나를 보고, 요즘 젊은이들은 참 경우 없다면서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 ‘나 때는 말이야...’ 같은 진부한 수식어를 덧붙이며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 것만 같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싶을 정도로 다른 아빠와 나. 서로 온갖 상처를 주고받았던 아빠와 나. 이런 관계마저 상쇄시키는 단어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마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관계성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빌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만사 제치고 달려와 줄 수 있는 사이. 내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관계. 승승장구해도 질투나 시샘 따위의 찌꺼기 같은 감정이 아닌 진심을 담긴 응원의 감정을 건넬 수 있는 사이.


최근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었다. 삶의 뿌리와 터전마저 흔들어댈 만큼 치명적인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사건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입맛마저 잃었다. 나의 실수로 비롯된 일이었기에 평소 늘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던지곤 하는 친구들에게도 쉽사리 털어놓기 어려웠다. 친구들이 나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판단할까봐 두려웠다. 그때 생각난 건 가족뿐이었다. 내 일을 당신들의 일처럼 기꺼이 고민해주고, 경청해 줄 사람들. 엄마와 아빠에게 차례로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럴 때만큼은 아빠도 든든한 내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결국 그 일을 온전히 짊어지고 해결한 건 나였다. 그럼에도 나를 온전히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나의 번잡한 정신을 붙잡는데 힘이 되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때론 목소리가 높아지는 언쟁을 벌이더라도 가족은 결국 가족이다. 미워도 사랑하는 가족이다. 이번 일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평생,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할 것임을. 아빠에게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서도 동시에 아빠를 영원토록 축복할 것임을. 이것이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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