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표지와 방황의 한복판에 놓여
의원면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의원면직은 신규 시절부터 외면하고 싶었던, 그럼에 도 필연적이고 필사적인 고민이었다. 고민은 끊어내려 할수록 견고해졌고 머릿속에서 지워 내 려 애쓸수록 선명한 상흔으로 남아 망령으로 맴돌았다. 고뇌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없이 늘어져 긴 뱀이 되어 내 목덜미를 노리는 것만 같았다.
고백하자면 교사'는 원래부터 나의 꿈이 아니었다. 성장해 나가고 성취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시적인 성과로부터 동기를 얻는 나의 성향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교육대학에 입학한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이었다고 단정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당시 수능 성적은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공부에 대한 자부심 하나만 동아줄처럼 대롱대롱 잡고 있던 나는 완전히 고꾸라졌다. 내 모든 자부심을 매달고 있던 동아줄이 실은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의 비참함이란. 산산조각 난 채 밟혀있는 자부심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교육대학에 지원했다. 얼떨결에 교육 대학에 합격했고, 정신 차려보니 주변 동기들처럼 임용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어느새 학생 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마음으로 교단에 섰으니 허무주의와 매너리즘의 도래는 예견된 절차였다. 주어진 의무만 꾸역꾸역 해결해 내는 마음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다. ‘교사가 내 천직이다’, ‘평 생 직장이다’ 같은 장밋빛 사고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의원면직에 대한 생각 이 사뭇 진지해지고 한층 더 짙어진 근원적인 이유는 나이 때문이다. 진정한 마음이 소리에 귀 기울여보지도 않은 채 진로 탐색의 기회를 미루다가 20대 후반이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삶의 방향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기이다.
여기서 더 망설이다가 시간을 끌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 배워나가기에도 늦어 버리지 않을까. 새로운 일에 도전할 기회를 영영 떠나보내지 않을까.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가슴 뛰는 일, 생각만으로도 벅찬 그런 일을 해보는 경험은 평생 놓친 채 살지 않을까. 새로운 일에 도 전하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무런 계획이나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의원면직 신청을 하는 것은 경솔한 행위이리라. 교사는 장점도 명백한 직업임이 분명하니까. 교사로서 남아있을 때 나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먼저 교사의 장점을 나열해 보았다. 하나, 퇴근이 다른 직종보다 이르다. 출근도 약간 이른 편이지만, 점심시간이 근무 시간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다른 직종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이 가능하다. 둘, 성과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롭다. 연구대회나 승진 준비 등에 관심이 있는 교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최소한 나의 경우, 승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나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는 필사적 압박감을 느낄 일이 없다. 셋,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공무원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리라. 넷, 육아 휴직 등의 육아 정책이 잘 마련되어 있다. 비혼주의가 아니고, 2세 생각이 어느 정도는 있는 편이기 때문에 이러한 장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교사의 단점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의원면직까지 고민하는 다소 교직에 회의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의 의견이기 때문에 단점이 조금 부각되어 보일 수 있는 점은 감안해 달라.
하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며, 매년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 반에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과, 그 학생들의 학부모들, 동료 교사들, 교장과 교감 같은 학교 내 관리자들... 관계 맺어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들은 거의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관계를 매번 새로 재정립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며 조금은 낯선 그들을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쏟아붓는 긴장감과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내내 나는 항상 앓아누웠다.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끙끙 앓아댔던 경험들도 비일비재했다. 새 학기라 몸이 고된 탓도 있었겠지만, 새로운 관계 맺음에 대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상당했던 이유가 컸다. 출근 시간 내내 스트레스와 긴장감으로 몸도 마음도 메마른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컵에서 쏟아져 형체를 잃어가는 물이 되어 몸도 정신도 쏟아진 채 한참을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더군다나 이 수십 가지로 갈라진 관계들이 모두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괜찮겠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모두 건강하길 바라는 건 불가능에 대한 소망이리라. 어떤 관계는 나를 지나치게 소모시키고, 괴롭혀댄다. 이러한 관계를 매년 리셋하고 번복해 나가야 한다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 요소이다.
둘, 감정 소모가 심하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생활하다 보니 교실 내 잦은 갈등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결국 조율하고 매듭지어주어야 할 책임자가 교사인 '나'라는 것이다. 살아온 방식도, 부모님의 양육 철학도, 기본적인 성품과 가치관 자체가 천차만별인 아이들이 갈등이 생겼을 때 그 갈등을 해결해 주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화해하고 서로 존중해 주라고 지도하여 표면적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는 있을 테지만-아이들에게 화해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이마저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교사가 급한 불을 끄듯 거칠게 마무리 지은 갈등은 기어코 재점화된다. 한 번 풀린 니트 조끼의 실오라기가 잡아당길수록 올이 길게 풀리며 옷을 망가뜨리듯이 그들의 갈등은 켜켜이 쌓여있고 곪아 있어 깔끔하게 매듭짓기 어렵다. 아무리 학교 내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더라도 이들의 관계는 비단 학교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학원이나 휴대폰 같은 학교 밖에서도 연결되기 마련이다. 갈등 해결에 대한 상담 신청이나 연락이 올 때마다 최선을 다하겠노라 말씀드린다. 실제로도 학생들의 등교 시간부터 하교 시간까지 내내 학생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말과 행동거지를 주시하며 갈등을 예방해 보려고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갈등 해결은 내 능력 밖의 일인 것을 알기에-하물며 내 갈등도 해결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어쩔 수 없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허무주의에 물든다.
셋, 교사의 책임 소재의 범위가 한없이 넓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갈등이 생기거나, 사고가 벌어지거나, 체험학습에서 안전 문제가 발생하거나, 학교 폭력이 발생하거나... 학생들의 문제 전반에 걸쳐서 교사의 책임은 불가피하다. 하물며 학교 내의 일뿐이 아니라 학교 외부의 일, 예를 들어 여름 방학 때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휴양지에서 만나 다툼을 벌인 일마저도 학교 폭력으로 접수가 되어 교사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사고가 안전 교육만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는 태초에도, 종말의 날에도 결코 이상적인 이데아의 모양새를 비추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도, 일촉즉발의 아찔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몸을 던져 초능력을 발휘해 학생들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세상의 모든 사고를 막을 능력도 교사에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교사의 책임이다.
넷, ‘아동학대’ 위험에서 결코 안전하기 어렵다. 아동학대, 입으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참혹한 단어이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상처받은 아이들의 모습이 추상화되는 참혹한 형상을 비추는 단어이다. 교단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학대’는 나와 평생 무관하리라 짐작했다. 정상적으로 생활한다면 ‘아동학대’는 나와 무관하지 않을까,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약자에게 가혹한 냉혈한이 아닐까. 무딘 사고로 바라보았다. 교직의 현장 한가운데에 내몰리고 나서야 ‘아동학대’는 때로 교통사고와 같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단연컨대, 아동학대범으로 불려 지당한 사람들을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잔혹한 아동학대의 참상에 대해 듣고 한없이 탄식하곤 했다. 그럼에도 교사 중, 생활지도 만으로도 아동학대의 누명을 쓰게 된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사는 학생들이 미래에 사회에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무를 등에 지고 있기에 때로는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들로 아이의 마음이 상했다고 ‘정서적 아동학대’로 신고당한다면. 최종적으로 무혐의 판결이 나더라도 이러한 판결까지는 몇 달, 심지어는 일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교사의 몸과 정신은 갈갈히 찢긴 채 만신창이가 된다고 한다. 교직에 있는 동안 ‘아동학대’의 그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지의 날개를 꺾어냈다. 꺾인 날개는 짓밟힌 채 산산조각이 났다.
적은 월급, 교사에 대한 높은 사회적 도덕적 기대치에 대한 부담, 수직적이며 폐쇄적인 공무원 문화 등의 자잘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는 계속 나를 망설이게 만든다. 중학생 시절 수행평가로 외웠던 시 <가지 못한 길>의 화자처럼, 한없이 길의 갈래에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며 맴돌아댄다. 과연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 스스로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은 무엇일까.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데 교직을 떠나면 어떤 위험이 나의 삶을 위협해 댈까.
어떤 선택을 하든, 현명한 선택이길. 솔로몬의 지혜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삶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는 지혜만큼은 부디 나에게 허락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