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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행복을 찾는 여정의 끝

by mz교사 나른이

고백하건대 나는 결코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다. 직장에 민원이 들어올까 봐 불안하고, 가족이 아플까 봐 불안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살이 찔까 봐 불안하고... 지인들이 걱정도 팔자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조급해하며 깔끔하게 일이 해결되는 그 순간까지 어쩔 줄 몰라한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면서도 끝없이 행복을 갈구했다. 행복은 무언가 특별하고 영원불변하며 빛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상태라고 단정 지었다. 염치없게도 과거의 나는 행복을 적극적으로 찾아 헤매기보다 행복이 어느 날 넝쿨째 굴러 들어오길 기다렸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여겼던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직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 대한 도피이고 또 한편으로는 순진했다고나 할까. 좋은 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다니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행복할 미래의 나를 위해서는 현재의 행복과 여유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학교를 졸업할 것이고 촉망받는 직업이 생길 것이며 멋진 배우자와 장밋빛 미래를 꾸려 나갈 것이고 결국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다.


행복에 대한 기대감 그 첫 단추는 대학 생활이었다. 수험생활을 겪어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희미한 볕마저 들지 않는 길고 긴 터널 같던 수험생 시절. 내신과 모의고사는 피할 수 없는 지뢰가 되어 곳곳에서 숨통을 조였다. 갓 떠오른 아침 햇살을 맞으며 등교하고 나면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 오래인 침침한 밤이 되어서야 야간 자율학습까지 꾸역꾸역 마무리 한 채 학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던 나날들. 그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더듬으며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연컨대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이었다. 터널의 끝자락에는 대학생활이라는 화려하고 찬란한 빛이 펼쳐지리라는 굳은 믿음이 존재했다. 당시 나에게 대학과 행복은 동의어였다. 학교 선생님, 부모님 같은 주변 어른들은 넘어지고 방황하던 수험생들을 일으켜 세우는 법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대학 가면 남자친구 생긴다’, ‘대학 가면 자유다’, ‘대학 가면 예뻐진다’, ‘대학 생활은 천국이다’ 나는 그들의 사탕발림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수험생활을 무사히 마무리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토록 그려내고 염원했던 대학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해졌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불행해졌다. 일차적으로는 목표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 과한 긴장 탓에 수능 점수가 좋지 않았다. 목표하던 대학에 가기엔 성적이 부족했고 결국 성적에 맞추어 부모님께서 원하시던 교육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원치 않았던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가슴 깊숙이 열등감이 뿌리내리고야 말았다. 열등감이라는 뿌리에서 소위 명문대에 간 친구들에 대한 시기 질투가 싹텄고 뿌리는 점점 깊어졌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거지만 당시에는 열등감으로 인해 명문대에 간 친구들의 SNS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열등감이라는 진득한 감정에 잠식되어 있었기에 대학교에 대한 애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대학 수업엔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과제도 지겹기만 했다. 그 흔한 동아리 활동마저 해보지 않은 채 티끌마저 남지 않은 밋밋했던 대학 생활은 졸업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의 신분이 되었다. 대학 시절 동안 미래 행복에 대한 실체 없는 환상의 결말은 파멸이라는 교훈도 얻지 못했는지 이번에는 직장인에 대한 새로운 환상이 피어올랐다. 직장인이 되면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낼 것이며 생활의 자유도도 높아질 것이고 결국엔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허울뿐이었던 상상 속의 행복은 또 한 번의 수험생활을 버텨내는 원동력이 되었고-미래에 대한 행복이 꼭 부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직장인이 된 후의 나는 비로소 행복해졌을까. 환상은 현실로 변모했을까. 다시금 말하지만 단연코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행복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말라버렸다. 신분이 직장인으로 변함으로써 사회에서 정해둔 마라톤의 결승선을 끊어 낸 것만 같았고 앞으로의 경로에는 행복이 놓여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삶의 단계를 따져 보자면 다음 단계는 은퇴일 터인데 은퇴하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이 남아있으니 그럴 수밖에.


이렇듯 평생을 미래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다. 학창 시절에는 대학 생활을 바라보며, 대학생과 수험생 시절에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며. 현재의 삶을 부인하며 아무도 기약하지 않은 미래의 행복만 좇아온 결과는 처참했다. 현재 놓인 장소와 환경에서 행복을 발굴해 낼 수 있는 능력치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하며 손꼽을만한 미래가 사라지자 희망의 자리에는 권태의 이끼가 피어났다. 집과 직장을 반복하는 삶은 권태롭고 지루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현실 감각이 돋아나서 삶과 행복에 대한 기대 자체도 쪼그라들었다. 권태의 이끼 위에서 굴러다니다가도 행복을 찾아 동호회나 소모임 같은 곳들에 기웃거리기도 했다. 사람들과 만나서 취미를 공유하며 쾌활한 미소를 나눠 갖는 경험은 특별하고 가치 있었으나 그때뿐이었다. 근원적인 삶의 행복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행복이라는 가상의 파랑새를 찾아 오랜 시간 동안 방황했다. 유튜브에서 명사들의 강연을 찾아 들어보기도 하고, 감사 일기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주변인 관찰’은 행복을 찾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해맑은 쿼카 같은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늘 온화한 표정을 띠고 있는 친구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밝은 에너지가 은은하게 묻어나는 친구들. 옆에서 지내다 보면 ‘아, 저 친구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느낄 수 있는 친구들. 그 친구들의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사는 무엇인지, 말버릇은 있는지 평소 그저 지나쳐왔던 사소한 일상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몇 달 정도 관찰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행복한 친구들이라고 해서 삶이 행운과 환희의 순간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행복한 순간들-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을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영민하게 포착해 내고 탄성을 내지르며 경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사소한 행운의 순간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짧고 일시적이며 불완전한 환희의 순간이라도 그때만큼은 영원의 행복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자신만의 세리머니를 만끽했다.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밀도의 행복과 불행, 권태가 주어지더라도 불행과 권태를 덤덤히 보내는 법을 알았다. 행복을 소중한 아기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매만지며 여러 번 곱씹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추억과 다가올 행복에 대한 기약을 원동력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분석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행복한 삶은 낚시해서 건져내는 물고기처럼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행복한 삶을 만들어내려 안달복달할수록 허망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은 천국이 아니므로 오롯이 행복으로만 눌러 담겨있는 선물세트 같은 삶은 허상이다. 삶의 여정에는 언제나 슬픔과 분노, 권태와 허망, 감사와 기쁨 같은 여러 성질의 순간들이 시간차를 두고 흘러가기 마련이다. 단지 나에게 주어지는 감사와 기쁨의 순간을 얼마나 만끽하는지에 따라, 그 순간의 가치를 얼마나 인지하는지에 따라 내가 느끼는 삶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심지어 우리는 행복과 기쁨의 순간을 지나치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흘러 보내곤 한다. 행복이 행복인지도 모른 채 더 큰 행운을 갈망하고 욕심내다가 불행의 어귀에 접어들고 나서야 알아차린다. ‘그때가 행복이었지’ 깨달으며 눈 한 번 맞추어주지 않은 채 무심히 보내버린 행복의 순간을 그제야 그리워한다. 과거의 행복이 지나가기 전, 그 행복을 한 번이라도 알아봐 주었다면 인생에서 느끼는 행복의 총량은 증가했을 터인데. 이렇듯 행복을 얼마나 세심히 알아보는지에 따라서도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행복의 양이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나는 행복에 대한 환상과 강박을 버린 후에야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난 행복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고, 그렇기에 반드시 행복으로 노력을 보상받아야 마땅하다는 사고를 집어던지고 나서야 보였다. 짧고 긴 환희의 순간들, 작고 큰 감사의 순간들, 그리고 보통의 날로 포장되어 간과해 왔던 평온한 나날들. 퇴근길에 들른 도서관에서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 행운의 찰나.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상의 근심을 망각해 버리는 시간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붉은빛이었던 신호등이 푸른빛으로 바뀌었을 때 느끼는 환희. 건강한 육체로 하루하루를 무사히 지낼 수 있는 안온함. 행복의 순간들은 연속적이지는 않지만 꽤나 자주 등장하는 길손 같다. 아, 이 행복을 알아보는 사람이 됨으로써 비로소 나는 행복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행복이라는 길손이 드문드문 찾아오는 것 같은 날엔 내가 행복을 찾아 당차게 문밖으로 나서리라. 아름다운 언어들이 소복한 시집 하나 챙겨든 채 커피 향기 그윽한 카페로 향해 여유의 순간을 만끽할 것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은 채 보고 싶은 얼굴을 보러 한걸음에 달려갈 것이다. 부모님 계신 본가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실컷 얻어먹고 부른 배를 두드릴 것이다. 행복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더 나아가 행복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됨으로써 나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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