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참을 수 없는가벼움
출국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있다. 다음 달엔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여행할 계획이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해외로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자타공인이 인정하는 여행광이다. 다음 달 이맘때즈음 산유국의 풍요에 온갖 감탄사를 남발하며 중동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호객꾼들과 언성을 높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색적인 향신료가 한가득 올라간 난생처음 시도하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숟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색다른 장소와 시간들이 굽이굽이 펼쳐질 것이고, 비일상적 시공간을 마음껏 유영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해외여행의 비용을 모으기 위해 평소에는 생활비를 아끼는 짠순이가 된다. 옷 사는 비용을 아끼고, 커피 값을 아끼곤 한다. 식료품값 한 두 푼이 아쉬워 마트의 매대 주변을 서성거리며 두부를 집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반복하는 쪼잔함을 감수하기도 한다. 찰나의 해외 체류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돈과 사투를 벌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봉의 급여로 일상을 영위하며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동시에 해외여행까지 다녀오려면 소비와 저축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해변가에 둘러앉아 친구들과 놀이하듯, 나뭇가지가 어설프게 꽂혀 있는 자그마한 모래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손톱을 바짝 세워 모래를 조금씩 깎아내리듯 박봉의 월급의 가장자리를 소심하게 긁어낸다. 긁어낸 월급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한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는 과정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항공권 가격 비교 사이트에 접속할 때엔 개인정보보호모드 전환은 단연코 필수다. 항공권 가격 비교 사이트에 지속적으로 기웃거린 기록이 남는다면 항공권 가격 비교 사이트는 내가 항공권 구매가 절박하다는 사실을 간파해 낼 것이다. 항공권 구매가 절박하다는 은밀한 사실이 발각된다면 그들은 야비하게 내 코 앞에 값비싼 비행기 티켓들만을 선택지로 들이밀 게 뻔하다. '어차피 비싸도 넌 항공권 살 거잖아!'라고 외치듯. 그러니 아무리 여행이 간절하더라도 항공권 가격 비교 사이트에는 '항공권이 살 만한 가격인지 보고, 가격 괜찮으면 여행 한 번 가보고.'라는 쿨한 소비자처럼 비추어져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모드의 도움으로 쿨한 소비자로 스스로를 둔갑시키고 -사실은 여행이 매우 고픈 절박한 소비자이면서도- 며칠 단위로 가격이 오르내리는 항공권 가격 그래프의 변화를 주시한다. '이 정도 가격이면 괜찮겠어!' 싶을 타이밍을 잡고 얼른 결제한다. 결제를 미루면 또다시 가격이 오를지도 모르니 약간은 서둘러줘야 한다. 몇 번의 밀당과 추세 관망의 과정은 도박만큼이나 짜릿하다. 성공적인 비행기 표 예매야말로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시발탄과 같다. 적절한 가격에 표를 샀다는 성취감과 합리적인 소비자가 된 듯한 기특함, 그리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솟구치는 엔돌핀.
다음으로 숙소 예매를 할 차례이다. 여행에 대한 고대를 벅차게 껴안은 채 여행할 날짜와 장소를 기입하고 돋보기 버튼을 누른다. 클릭 한 번으로 1분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타국의 숙소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세련된 건물 사진과 함께 아늑하고 행복한 경험을 기약하는 듯한 숙소 설명에 홀라당 넘어간다면 하수다. 숙박비가 합리적인가, 숙소의 위치는 관광지에서 너무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사진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건물이 너무 노후화되어 보이지는 않는가-사진만으로 노후화되어 보이는 건물이 실제로 더 나을 확률은 거의 없기에-를 깐깐하게 따져 몇 곳의 후보군을 선정한다. 후보로 선정된 숙소들의 후기를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보며 가장 마음이 이끄는 숙소를 최종적으로 선정한다. 숙소는 여행지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이다. 내가 선택한 숙소는 머나먼 타국에서 나의 소중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리라. 나의 투박한 여행가방과 허물스러운 옷가지들과 마구 구겨 넣은 잡동사니들을 든든히 지켜주리라. 하루종일 타국에서 배회한 끝에 축 처진 건조한 사금파리가 되어 돌아온 나에게 어떠한 것들도 캐묻지 않은 채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주리라.
비행기 표와 숙소 예매라는 언덕을 무사히 넘고 나면, 허무맹랑한 여행의 소망이나 고대감 같은 간질한 감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춘 채 굳어 구체화된다. 기대감에 색이 덧입혀진다. 그 색은 희망의 하늘색이나 벅차오르는 노란색일 것이 분명하다. 기대와 소망에 실행력을 덧붙임으로써 게임의 레벨이 올라가듯 여행 소망자에서 여행 예정자로 신분 도약이 이루어진다. 반복과 되새김질로 지리한 일상에 작지만 탄력 있는 용수철 하나를 덧댄 것만 같다. 머지않아 본래의 그 자리로 되돌아올지라도 용수철을 힘껏 눌러 튀어 오르리라. 처음 마시는 공기에 흐느적거리며 녹아있는 미묘한 이국의 향을 기꺼이 들이키리라. 세상에 초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망울, 호기심이 쏟아지다 못해 흘러내릴 것만 같은 깊은 동공으로 바라보겠다. 이국의 흙, 나무, 건물들, 사람들까지 느리고 세심한 시선으로 훑어내겠다.
여행으로 떠난 만리타국에서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리라. 완벽한 타자가 되어 낯선 땅을 딛고 거닐리라. 그 땅에서 머물도록 주어진 시간은 인생의 찰나. 호흡 한 번만으로도 들이마실 수 있을 법한 찰나의 순간만이 허락된 이방인, 손님, 그리고 타자.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한없이 가벼운 마음, 산들바람만으로도 날아가버릴 듯한 가뿐함으로 여행의 그 순간을 탐험하고, 만끽하고, 머금을 것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만물에 대한 어떠한 고뇌도 고민도 필요 없으리라. 만리타국을 가볍게 밟은 여행자의 의무는 주어진 시공간에 대한 한없는 감탄과 환호, 얕은 식견에서부터 비롯된 여행지에 대한 평가나 비판. 그리고 단순한 재미로 지껄이는 고국과 여행지에 대한 비교 정도일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삶의 터전인 곳을 벗어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시공간에 생애 처음으로 스며들며 내가 아는 삶의 풍경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이 넓은 우주에서 티끌보다 작고 사소한 스스로에 대한 성찰 정도면 충분하리라.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에 필연적으로 매달려오는 삶의 짐. 때로는 애잔하고 구질거리는 삶의 짐. 가끔은 거추장스러운 그 짐은 고국에 고이 접어두고 나는 떠날 것이다. 가벼운 몸과 영혼으로. 만리타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