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열다
채식주의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해 뜨거운 소설이다. 이제 십여 장 읽고 있어 이른 평은 삼간다.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다. 독특하다. 기대감을 가지고 틈틈이 정독을 해야겠다.
중편소설 채식주의자에 대한 감상
이미 먹은 고기는 소화기관을 통해 피와 살이 다 소화가 되어 찌꺼기는 몸 밖으로 빠져나갔을지라도 몸을 순환하는 핏줄에 혹은 내부의 심리에 여전히 생명파괴의 자책이 남아있다. 어느 날 갑자기 끔찍한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이란 것은 죄의식도 없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니 유희를 위한 습관으로 다른 생명을 파헤쳐 식용으로 사용함에 대한 타인들을 대변하는 고통스러운 꿈인데, 영혜라는 주인공은 다른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속죄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파괴해 나가게 된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평범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 사람을 작가는 어느 날 돌연한 꿈속으로 끌어 들어 자신의 대변자로 만든다. 주인공은 꿈을 꾼 이후로 육식을 중단하고 채식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퇴행을 시작하게 된다. 몸은 나무젓가락처럼 말라가고 가슴은 선명하게 남은 젖꼭지를 제외하면 몸에서 사라져 간다. 육식의 중단과 가슴의 퇴행 사이에서 작가는 생명에 대한 속죄를 암시하는 듯하다. 모호했던 꿈은 반복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구체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너무나 평범함을 추구한 나(화자) 남편은 그런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혐오스러움으로 마음에서 격리를 시켜나가게 되고 모든 육식하는 타인을 대변하고 있다. 자해를 함으로써 미수에 그쳤지만 결국 행위로는 자신을 살해하고만 영혜. 자신의 몸을 육식하는 타인에게 기꺼이 육식의 대상으로 희생하고자 했던 것인가.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몸을 통한 대가 희생이 작은 동박새를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다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흰둥이처럼 물어뜯어 생명을 앗아가는 역행의 대미로 끝을 맺으며 중편소설은 여운을 맺는다. 생명에 대한 존귀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며 식육이 되고 있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죄의식 없는 생명 유희를 질책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다고 무목적적인 채식을 옹호함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기 아닌 타인이 모두 식용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종소리 인지도 모르겠다.
중편 몽고반점에 대한 감상
전편 채식주의자에 비해 긴장감의 밀도는 다소 떨어진다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자는 꿈이라는 메모 같은 이야기를 통해 시적 상상력이 개입되어 상상의 힘을 충분히 엎고 들어가야 한다면 몽고반점은 서사적 구조에서 평면적 이미지화를 생각하게 하는 듯했다. 그러나 작가의 문체는 뒤로 갈수록 긴박해지고 여전히 시적인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삶과 죽음, 약육강식, 희생적 자아 파괴라는 무거운 주제에서 어쩌면 성적인 약자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자기 속박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을 몽고반점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모순이다. 영혜는 여전히 정신적인 백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없어질 것이라 여긴 꿈을 여전히 꾸면서 꿈에 나타나는 얼굴에 집착한 상태, 처럼 삶을 정지해 있고 그 부조리를 화자는 욕망의 집요성에 대입시킨다. 성적인 관념의 표출이 예술인가, 퇴폐인가는 무의미하다. 가장 광범위한 예술행위는 퇴폐에서 비롯되기 일수다. 그토록 금기 시 여기면서도 은밀하게 탐닉되는 성적행위는 예술의 근간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분출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나친 억제와 통제가 오히려 음지를 만들어내고 변태적 파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퇴폐니 변태니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근친이라면 근친인 아주 흔한 삼류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처제와 형부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몽고반점이란 상징성을 매개체로 한 작가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녀, 영혜, 처제를 모델로 보디페인팅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른 육체가 주는 성스러움이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인상이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 하기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일체의 성적 자태가 느껴지지도 않고 일체의 욕망이 배제되어 있는 육체 그 알몸의 덧없음에서 오는 군더더기 없는 무언의 언어들을 화자가 느끼듯 나도 느껴본다. 그러나 한번 품은 욕망은 절정을 스스로 찾아가고 만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예술혼이 아니라 인간의 기저에 숨어버릴 수 없는 욕망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녀의 육체는 찬란하게 번쩍이며 태초부터 그대로의 모습, 몽고반점을 간직한, 욕망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원시성에 머물러 있다.
중편 나무 불꽃에 대한 감상 그리고 연작소설의 마무리
작가는 여동생인 영혜를 기점으로 작품의 전개를 이어간다. 몽고반점에서는 형부가 화자가 되어 비정상적인 행위의 정상화에 치중하다 정신의 자유, 채식주의자의 상징적인 꽃나무의 탄생으로 종결했다. 이제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가 화자가 되어 채식주의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몸에 입사귀가 나고 손에서 뿌리가 돋아 땅속으로 파고들고 사타구니에서 꽃이 활짝 피는 나무가 되는 영혜, 육체의 식물화를 통해 작가 자신의 자의식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듯 보인다. <활짝 꽃이 피는 나무, 나무 불꽃> 모든 나무는 똑바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팔로 땅을 받치고 물구나무를 서있다라는 문장을 보면서 이제야 작가가 연작소설의 마지막 지점에서 하고자 하는 선언적 의미를 짐작해 본다. 작가가 정신병동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묘사하면서 왜, 보통의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생각들을 투영하지 못하고 정신적 비이성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연출의 의도를 볼 수가 있다. 누가 정상적인가에 대한 담론은 제쳐두고 지극히 비정상적인 영혜의 정상성을 담보해 놓기 위한 의도된 배경이 정신병동일 수밖에 없다는 데 동감한다. 영혜는 나무의 물구나무서기를 발견하면서 이제 본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고기야 애초에 먹지 않았고 다른 모든 음식도 거부하면서 물과 햇빛을 통한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식물은 내장이 없다. 퇴화시키고 싶은 자신의 내장기관과 말도 생각도 모두 지워버리는 것, 그것이 영혜의 식물화였다. 인혜의 삶의 흔적들은 어떠했던가 들여다본다. 지극히 정상적일 거라고 외견은 말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삶의 굴곡은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인에 대한 배려와 인내와 절제로 일관된 성공?적인 생활인이었지만 이미 자신은 죽어있었던 것이라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일깨운다. 모든 정상적인 삶이라 할지라도 죽음과 같이 생명을 뒤로 감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 그대로 투사되는 것이 인혜의 삶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상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 비정상이 아닌 작지만 잔잔한 역설이 배경처럼 흐른다. 모든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는 꿈이 현실 같지만 깨고 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우리는 아직 꿈을 꾸고 있어서 우리가 깨고 나면 그때는… 작가는 말줄임표에 자신의 이야기를 함축해버리며 끝을 맺는다.
정말 살아간다는 것이 모두 꿈일지도 모르는 것일까. 지금 나도 너도 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고단함과 부조리에서의 도피가 꿈이란 未意識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인가. 선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작가도 나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결단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다르다. 다른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범위도 다른다. 누구나 꿈과 현실의 경계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