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옥 Oct 11. 2017

잿가루

#83

그날은 따뜻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떨렸다. 초조함과 막연함으로 앉아 있는데, 내가 들고 있던 표의 번호를 부른다. 황망히 일어나 나를 부른 곳으로 향했다. 능숙해 보이는 은행원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내 얼굴을,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본다.

안 떨어지는 입을 벌려 조심스럽게 “카드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라고 말했다. 은행원이 직업을 묻는다. “작가인데요”라고 대답하자 “어디 나가세요?”라고 되묻는다.

“전업 작가인데요.”

“네?”

“나 혼자 작품해요. 그래서 전시도 하고요.”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은요?”

“없는데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내 눈동자를 찾는다.

“그러면 할 수 없습니다.”

의자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다음 번호를 크게 부른다. 어깻죽지가 유난히 넓은 여인이 몇 개의 통장을 두 손으로 마주 잡고 내 앞으로 다가선다. 벌에 쏘인 듯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이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밖은 너무나도 화창한 봄날이다. 봄볕이 내 몸 구석구석을 마구 쏘아댄다. 무심히 내 눈에 들어온 스웨터의 앞자락에는 점심에 먹은 김칫국물이 얼룩져 있고, 그 위에 조용히 앉은 선명한 붉은빛의 고춧가루 하나, 스웨터에 생긴 보푸라기는 한겨울 고드름처럼 봄볕에 죽죽 늘어져 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평생 나만 따라다니는 작품들… 내게 남은 건 까맣게 타들어간 잿가루뿐인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이다.


조그만 새 한 마리가 북쪽에서 배를 향해 다가왔다. (…) 노인은 새가 몹시 지쳐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노인의 머리 주위를 맴돌다가 좀 더 편하게 느껴질 법한 낚싯줄 위에 앉았다. “넌 몇 살이나 됐니?” 노인이 새에게 물었다. “이게 너의 첫 나들이니?” 그가 말하는 동안 새가 그를 바라보았다. 새는 너무나도 지쳐 있어서 낚싯줄이 앉기에 적당한 곳인가를 확인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새는 가냘픈 발로 낚싯줄을 꼭 움켜쥔 채 불안정하게 몸을 앞뒤로 까닥였다. (…) “조그만 새야, 푹 쉬어라.” 그가 말했다. ‘사람이나 새나 고기나 다 그러하듯 기회를 엿보아 행운이 오면 잡기를 바란다. (…) 낚싯줄이 갑자기 움직이자 새가 날아올랐고 노인은 날아오른 새가 가버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벚꽃이 마음껏 핀 나무 사이를 느리게 걷는다. 벚꽃잔치가 한창인 아파트 단지에는 남색과 붉은색의 청사초롱이 줄줄이 걸려 있다. 밤이 되면 아롱다롱 불빛이 생기겠구나. 그래, 난 그 빛 아래 작은 새. 잿가루로 만든 작은 새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마른 뼈에 메마른 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