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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feat. 망태할아버지 추억

요며칠 동안, 아이들과 하는 잠자리 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바로 아이들과 관련된 추억을 들려주는 것.


첫째는 너무 재미있어 하며 재잘댔다.

'엄마, 내가 태어난 날 삼겹살 먹었어?' '엄마, 내가 태어날 때 왜 울었어?' '엄마, 운이 태어났을 때 운이가 내 선물만 가지고 왔잖아'(동생이 태어날 때, 동생이 큰애에게 주는 선물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고 하면, 동생을 좋아한다고 해서, 선물을 준비했었다). 큰애는 동생에게 선물을 받았던 사실을 흡족한 기분으로 떠올리고는, '운아, 그런데 그때 선물 어디서 사왔어?'라고 묻자, 옆에서 동생은 '으응, 문방구에서 사왔지'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첫째가 태어나던 해부터 둘째가 태어난 해까지는 얼추 그래도 한해에 두세가지씩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서, 며칠에 걸쳐 시리즈별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출산 이벤트, 돌잔치, 해외여행 등 큼지막한 행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가 태어난 다음해부터는 큰 행사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원하는 첫째에게 해줄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그래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답답했다.


최근 이슬아 작가 책을 연이어 두권을 읽었는데, 그녀는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많아서 좋아보였다. 나는 왜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행복은 한방의 큰 이벤트가 아니라 작고 소소한 일들이 쌓여 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사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흔살에는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일상들을 많이 써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아이들과 곶감 빼먹듯, 그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소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차원에서.

덧1. 둘째는 며칠 전까지 망태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다. 여러 가지 떼를 부리는 상황에서 특효약이었다. 둘째가 밥말고 과자를 먹으려고 하면, 망태할아버지가 과자를 가져갔다고, 밥을 먹으면 망태할아버지가 과자를 돌려준다고 할 때도 많이 써먹었고, 밤에 남편이 일을 해야 할 때는 아빠는 거실에서 망태할아버지가 오면 물리쳐야 하니, 아빠는 거실에 나가라고 하자, 라고 할 때도 곧잘 써먹었다. 사실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짓말이었다. 과자를 숨길 때는 별다른 속임수 없이 심플하게 과자를 부엌 선반에 넣었고, 나중에 부엌 선반에서 그대로 과자를 꺼내면서 말만 '어머 망태할아버지가 돌려주셨네'라고 이야기했다. 신랑은 (자신이 보기에 영특해보이는) 둘째가 망태할아버지를 믿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둘째는 신랑의 생각보다(?) 영특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망태할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시간이 가도 식을줄을 몰랐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밤에 잘 때는 망태할아버지가 들어올까봐 꼭 안방문을 닫는 것을 확인했고, 남편이나 나 중 둘 중 한명은 망태할아버지를 무찌르기 위해 거실로 내보냈다. 나는 둘째에게 공포심을 심어준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의 정서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떼를 부리는 상황에서 그 동안 잘 써먹기는 했지만, 이제는 진실을 말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운아. 엄마가 사실은 할말이 있어. 실은 망태할아버지는 없어.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했다. 둘째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보여준 망태할아버지 그림을 떠올리며 '아냐 있어. 망태할아버지 뾰족한 손톱도 있잖아'라고 주장했다.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어 '아냐 운아. 엄마가 거짓말한거야. 미안해'라고 말하며 꼭 안아주었고, 옆에서 첫째도 '운아. 착한 산타할아버지는 세상에 있어도 나쁜 귀신은 없어'라고 나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둘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운아. 사실은 엄마가 망태할아버지를 어제 먹어버렸어. 그래서 이제 없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둘째는 이 말을 믿었다. 그래서 둘째는 망태할아버지는 세상에 없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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